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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에 실린 ‘짝지 아버님’, 펜드로잉. 그림 박조건형·글 김비

아버지의 잘린 손은 어디에 있을까

[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⑧ 한국전쟁 상이군인 아버지공포의 상징, 아버지의 왼손오십이 되자 비로소 궁금해진진짜 왼손은 어떻게 생겼을까아버지 머리에 남은 총탄과 파편뇌전증 시달리며 괴로워한 평생열병식 뒤에 국립묘지 묻혔으나애국의 이름으로 희생된 생애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적어본 적 없었다. 이 한 문장을 쓰기 전까지 나는 꽤 오래 ‘아버지’라고 적어야 할지, ‘의식씨’라고 적어야 할지 망설였다. 나를 만든 모성으로부터는 한 발짝 물러나도 괜찮았지만, 왠지 부성으로부터는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모성으로부터는 단호히 멀어졌으면서, 왜 아버지에게는 그럴 수 없었을까? 내 안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떻게 그 이름을 잃어버렸고, 어쩌다 그렇게 되고 말았을까?

아버지의 고향을 적고 싶지만,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몇 년생인지 적어야 하겠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몇 번 눌러보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요즘의 기록부이니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몰랐던 아버지의 출생을 마치 알았던 것처럼 적는 일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나는 몰랐고, 기억나지 않으며, 아들인지 딸인지조차 모르지만 스스로 무관심하고 파렴치한 자식이란 건 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지금도 발끈하며 대답할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모르고 싶고, 기억하고 싶지 않으며, 내 삶에서 지워버렸다. 이제 오십이 되어 아버지를 적으려는 것이 케케묵은 용서 따위를 주고받고 싶은 마음은 아니다. 스러지거나 잊힌 모든 것들 중에 아버지의 이름을 건져올리고 싶을 뿐이다. 나도 이제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던 때의 그 나이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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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았다. 상이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던 그 나이가 나도 되고 말았다. 김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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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발작, 가족의 현실

아버지에 대한 내 첫번째 기억은 ‘왼손’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왼손을 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에게 왼손은 없었고, 한국전쟁 참전 중에 잃어버린 손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어느 곳 어느 전투에서 당한 부상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내 기억은, 바로 그 존재하지 않던 아버지의 왼손에 관한 것이다.

손목이 잘려나가 은빛 쇠갈고리로 갈음된 그의 왼손은, 가족 모두에게 아버지의 상징이었고, 공포의 상징이었다. 갈고리와 이어진 와이어를 반대쪽 어깻죽지에 걸어 오른팔의 힘으로 움직였는데, 쇠갈고리를 벗은 아버지의 뭉툭한 손목은 팔꿈치처럼 자잘한 주름이 잡혔고,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때 내 온몸을 지배한 것은 공포뿐이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오십이 된 지금에야 아버지의 진짜 왼손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따금 궁금해진다. 전쟁이 잘라먹은 그의 손 하나가.

또 다른 아버지의 기억은, 똥이었다. 전쟁이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것이 손 하나뿐이었으면 좋으련만, 아버지의 몸속 곳곳에는 총탄과 갖가지 파편인 쇳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이마에는 꼬챙이로 찌른 것 같은 움푹 팬 자국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어린 내 손가락을 끌어 그 자국에 가져다댄 적이 있다. 움푹 팬 자리 제일 깊은 곳에서 만져지던 뾰족한 것의 감촉은 아주 단단했고 선뜩했다. 피부로 만져지는 감촉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는데, 아버지는 머릿속에 그 쇳조각들을 품은 채 살아야 했고, 덕분에 뇌전증, 이른바 간질이라는 병으로 평생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는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발작으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는데, 그때면 몸속 모든 분비물이 몸 밖으로 밀려나왔다. 보이지 않는 줄을 목에 동여맨 사람처럼 몸부림치고 버둥거리다가 거품을 물고 끄억끄억거리면, 배설물 냄새가 집 안에 진동했다. 엄마가 있을 적에 우리 삼남매는 건넌방으로 피하면 되었지만, 엄마가 집을 나가고 난 후 그 뒤처리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 되었다. 아버지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어지고 등 뒤의 유령과 대화하듯 고개가 꺾여 돌아가기 시작하면 우린 온돌방 바닥에 깔려 있던 이불부터 끌어내 치웠다. 그러고도 배설물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아버지의 옷가지는 어쩔 수 없었는데, 똥에 범벅이 되며 굳어가는 아버지의 몸을 내려보는 일에 우린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아니, 익숙해진다는 표현은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이런 우리 가족의 현실 앞에, 더 이상 그 어떤 비명이나 울음도 쓸모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늙어갔지만, 아버지의 발작은 늙지도 않았다. 어느 겨울 한밤중에 다시 또 발작으로 배설물에 범벅이 된 아버지의 옷을 벗기는데, 정신이 채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가 자꾸 몸부림을 쳐 온 방 안에 똥칠을 하고 있었다. 제발 가만히 좀 있으라고, 이러면 어떻게 씻기느냐고 아버지와 씨름을 하다가, 나는 속옷만 입은 아버지를 그대로 한겨울 수돗가로 끌어냈다. 꽝꽝 얼기 시작한 수도꼭지를 돌려 똥범벅이 된 아버지에게 찬물을 뿌리며 아버지의 몸뚱이를 고깃덩이 씻듯이 이리저리 뒤집으며 씻겼다.

옆방에 세 들어 살던 사람이 잠이 묻은 눈으로 문을 열고 나와 물이라도 데워 씻겨야지 그러면 어떡하냐고 잔소리를 뱉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배설물로 범벅이 된 아버지의 몸도, 어느새 훌쩍 커버린 내 남자의 몸도 혐오스러웠고 지긋지긋했다. 찬물에 헐떡거리는 아버지의 숨소리를 듣지 않았고, 힘 센 남자 몸으로 버둥거리는 아버지를 내리눌렀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른 만큼, 나 역시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지옥이었다. 나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지옥이었다. 그런데 혹시 아버지에겐 더 끔찍한 지옥이 있었던 건 아닐까?

아버지의 머리가 새하얘지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자주 울었다. 전쟁은 손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눈 하나도 빼앗아갔는데, 눈동자가 없는 움푹 팬 눈에서 눈물은 흐르지 못하고 질질 샜다. 주름진 얼굴로 번지는 눈물을, 아버지는 남은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어깨에 힘이 없어 더 이상 쇠갈고리도 끼우지 못했고, 그토록 좋아하던 막걸리 잔 앞에 앉아 이따금 서럽게 울었다. 차마 울음으로밖에 토할 수 없었던 그 마음속 말들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머리가 다 큰 오빠도 나도 그런 아버지를 가엾게 여길 줄 몰랐고, 각자의 생에 짓눌려 지독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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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김비씨 남편 박조건형씨가 장인의 묘에 참배하고 있다 김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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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은커녕 두려워하거나 무시하거나

아버지의 죽음은 벼락처럼 왔다. 아버지의 생을 끝낸 것은 이번에도 배설물이었다. 배 속에 변이 가득 찼지만, 이미 여러가지 합병증으로 몸이 쇠약해 변이 나오지 않았고, 관장까지 했지만 아버지는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의 주검을 둘러싸고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열병식이 진행되었고 유해는 국립묘지에 묻혔지만, 애국의 이름으로 희생된 아버지의 온 생애가 제대로 기억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나뿐인 손으로 아버지는 국가유공자 배지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셨는데, 사람들은 아버지를 존경하기는커녕 두려워하거나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기는커녕 싸잡아 패악질하는 인종 취급하기 일쑤였다. 훈장이나 애국자의 고결함은 계급순으로 매겨졌고, 총탄의 맨 앞에 섰던 사병들은 연금 몇 푼으로 가산점 몇 점으로 간단히 지워졌다.

전쟁은 이제 ‘로그오프’ 하면 되는 게임이 되었고, 이념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꾼들의 크기만 커다란 깃발이 되었다. 평화와 반전의 메시지들은 간단히 훼손되어가고, 우리는 너무도 쉽게 전쟁을 말하며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 되어간다. 왜 깨달음은 항상 너무 늦게 올까? 아버지가 잃어버린 손을, 이제 누구도 찾을 길 없다.

▶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 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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