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오브 아프리카’ 케냐 농장의 ‘커피 혁명’은 계속된다
[토요판] 서필훈의 얼굴 있는 커피⑦ 케냐 은다로이니 커피 가공소‘아웃 오브 아프리카’ 주인공 카렌열정적으로 커피 농장 일구던 케냐다국적기업 지배로 커피농민 어려워 은다로이니 커피 가공소와 함께가공소-구매업체 직거래 열어커피 탈취, 전기 차단 협박에도1400여명 생산자 굳건히 뭉쳐비료와 농약 살 여유가 생기니60년 만의 흉작에도 은다로이니생산자들 수확량은 오히려 늘어
<아웃 오브 아프리카>. 이 영화는 케냐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 사랑에 대한 소묘로 유명하다. 나는 주인공 카렌이 열정적으로 커피 농장을 일궈나가는 장면에 특히 눈길이 갔다. 덴마크인 카렌은 블릭센과 결혼해서 케냐로 이주했다. 카렌은 영국 식민지 시절 케냐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백인 농장주였지만 농장에서 일하는 키쿠유 부족을 존중하고 그들의 주거와 의료, 교육을 개선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져서 전운이 드리워도, 남편이 자신과 농장을 버려두고 밖으로만 나돌아도, 새로운 연인 데니스와 사랑하고, 헤어져도 카렌은 커피 농장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그녀의 농장이 있던 지역은 토양과 기후가 커피 재배에 적합하지 않았고 계속된 가뭄으로 재정적으로 큰 손실을 보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커피 가공소에 불이 나면서 그녀는 17년 만에 케냐 생활을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카렌은 농장을 토지개발업자에게 넘기며 키쿠유 부족을 쫓아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지금도 나이로비 남서쪽에 위치한 이 넓은 지역은 카렌으로 불린다. 카렌은 아프리카를 떠난 후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카렌이 귀국 후 덴마크에서 출간한 영화와 같은 이름의 자전적 소설은, ‘나는 아프리카 응공 언덕 기슭에 커피 농장을 갖고 있었다’로 시작한다. 그녀에게 커피는, 커피 농장을 경영한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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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에서 온 바리스타, 마틴
이곳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나는 마틴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는 도심에 새로 개장한 복합 쇼핑몰의 커피숍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다. 매번 느끼지만, 나이로비 도심은 커피밭이 펼쳐진 케냐의 농촌과는 큰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다른 세상이다. 나이로비는 동부 아프리카의 핵심 도시로 유엔 아프리카 본부와 여러 산하 기구, 비정부기구(NGO) 사무실, 아프리카 시장에 진출한 유명 외국 회사가 많이 자리 잡고 있어서 늘 활기 넘친다. 마틴은 케냐가 훌륭한 커피를 생산하는 나라인데도 정작 케냐 사람들은 수출하고 남은 품질 낮은 생두와 투박한 로스팅, 바리스타의 기술 부족으로 좋은 품질의 커피를 마시기 쉽지 않다며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의 꿈은 케냐 사람들에게 최고의 케냐 커피를 제공하는 것이다. 내가 마틴을 처음 만난 것은 2017년 서울에서 치러진 세계 바리스타 대회를 얼마 앞두고였다. 케냐 대표가 연습할 공간을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회사 연습실을 내줬다. 마틴은 늘 웃는 얼굴에 친절해서 우리 직원 모두 그를 좋아했다. 대부분의 선진국 바리스타 대표는 팀을 이뤄 대회에 참가한다. 그들의 대회용 기물은 화려하고 시연 대본은 유행에 충실하다. 마틴은 혼자 트렁크 달랑 들고 왔는데 기물이 모두 너무 낡고 온전하지 않아 도저히 그대로 대회에 들고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종용해서 우리는 같이 장을 보러 갔고 구할 수 있는 기물을 급하게 구했다.
예선이 끝나고 마틴을 도와주러 함께 대회장에 갔던 바리스타한테서 연락이 왔다. 출전을 앞둔 선수들은 순번에 따라 무대 뒤편 연습실에서 시연을 준비한다. 그런데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헝가리 선수가 탄식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준비한 기물이 파손된 것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도 잠시 후 출전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선뜻 자신의 기물을 빌려주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마틴이 흔쾌히 자기 기물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순간, 헝가리 선수뿐만 아니라 연습실에 있는 모든 선수가 놀랐다. 다행히 시연을 마친 헝가리 선수는 기물을 늦지 않게 마틴에게 돌려줬고 마틴도 준비한 시연을 잘 끝냈다. 나중에 전해 들었는데, 마틴은 대회에 참가한 국가대표 바리스타 가운데 가장 인기 많고 사랑받는 바리스타였다고 한다. 바리스타가 사랑해 마지않는 바리스타라니. 그는 높은 순위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바리스타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말하는 환대와 배려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는 총 16명을 뽑는 준결승에 아프리카 바리스타 최초로 진출했고 세계 올스타 바리스타로 선정돼 전세계 커피 행사에 참여하며 바쁜 한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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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보카와 함께 악순환 끊은 생산자들
케냐의 가장 중요한 커피 산지는 나이로비에서 북쪽으로 150㎞ 정도 떨어진 중부고원의 니에리 근방이다. 간선도로에서 벗어나 황톳빛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비포장도로를 얼마간 더 달리면 은다로이니 커피 가공소가 나온다. 케냐는 고품질 커피로 유명하지만 최근 수확량과 품질이 떨어지면서 예전의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상기후 영향도 있지만, 그보다는 케냐가 가진 커피 거래 구조 탓이 크다.
커피 가공소에는 적게는 수백명에서 수천명의 소규모 커피 생산자가 속해 있다. 그들은 텃밭에서 기른 커피 열매를 수확해서 가공소로 가져온다. 그러면 커피 열매 껍질을 벗긴 후 발효시키고 건조해서 파치먼트(얇은 껍질에 감싸진 상태의 커피 생두)로 만든다. 가공소는 상위 조합에 소속되어 있는데 조합은 판매 대리인을 고용해서 커피를 드라이 밀(건식도정소)과 수출업자에게 넘기고 수출업자는 대부분의 커피를 커피 경매소를 통해 수입업체에 판매한다. 각 단계에서 수수료가 발생한다. 그런데 문제는 판매대리인, 드라이 밀, 수출업체, 수입업체가 모두 몇몇 다국적기업 소속이라는 점이다. 내부 거래인 셈이다. 소수의 다국적기업이 수직계열화를 통해 시장을 독점지배하다 보니 생산자 편에서 이익을 대변하는 주체나 구조적 장치는 없다. 케냐 커피는 품질이 좋은 만큼 국제거래 가격이 비싼데 정작 케냐의 커피 생산자는 턱없이 낮은 대금을, 그것도 열매를 넘기고 보통 5~6개월 후에 받는다. 그러다 보니 커피 농사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료와 농약, 설비를 살 수 없고 커피 생산량과 품질은 떨어지기 일쑤다. 결국 다음 수확 때는 더 낮은 대금을 받게 되고 악순환이 계속된다.
하지만 지난해 네덜란드 스페셜티 커피 수입업체 트라보카는 이런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대응방안을 은다로이니 가공소 생산자와 함께 공유하고 다국적기업에 속하지 않은 독립 드라이 밀과 수출업체를 끌어들여 다 함께 도전을 시작했다. 가공소와 구매업체 간에 직거래를 트는 것이다. 이 방식은 더 많은 이익을 생산자와 소비자에게 돌려줄 수 있다. 하지만 다국적기업 카르텔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시도가 성공하면 다른 커피 가공소들의 이탈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로비가 시작됐고, 가공소에 보관된 커피에 대한 탈취 시도가 있었다. 가공소의 전기를 차단하겠다는 협박과 다시는 커피 거래를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위협까지 받았지만 1400여명의 은다로이니 생산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트라보카는 기존 커피 가격보다 최소 갑절 이상 되는, 케냐에서 가장 높은 금액을 생산자가 커피를 가공소로 가져오는 즉시 지급했고 가공소 설비 개선을 위해 추가로 돈을 적립했다. 이렇게 은다로이니가 생산한 커피 전량을 구매했다. 트라보카는 이 프로젝트에 동참할 로스터가 필요했고 우리는 기꺼이 함께하기로 했다. 우리가 구매하는 최종 가격은 다른 케냐 커피보다 싸지 않았지만, 그 가치와 가능성에 공감했기 때문에 참여했다. 이런 커피 거래 방식은 지금까지 케냐 커피 역사에 없었고 케냐 언론에서는 이를 케냐의 커피 혁명이라고 언급했다.
결과는 아주 흡족했다. 올해 케냐 커피 작황은 지난해에 이어 60년 만에 최악의 흉작을 기록했다. 낮은 커피 가격에 커피 농사를 포기하고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가 많아졌다. 이번에는 특히 병충해가 심했는데 대부분의 생산자는 농약 살 돈이 없어서 커피나무가 병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은다로이니 생산자는 수확량이 지난해보다 오히려 갑절로 늘었다. 지난해에 받은 높은 판매 대금으로 비료와 농약을 사고, 농장을 돌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확량이 늘어난 만큼 은다로이니 생산자의 올해 수입은 지난해의 갑절이 되었다. 내가 방문한 날은 마침 가공소 생산자 회의가 있었다. 많은 생산자 앞에서 은다로이니 가공소 대표는 나를 은다로이니 프로젝트의 일원이라고 소개했다. 생산자들 표정이 무척 밝았다. 우리는 가공소에서 나와 인근 커피 농가를 방문하기 위해 오솔길로 들어섰다.
마중 나온 여성 생산자는 큰 소리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녀의 걸음은 무척 빨랐고 나는 좁고 발이 빠지는 축축한 농로를 허둥대며 따라갔다. 그녀는 우리를 부엌으로 먼저 안내했다. 한쪽에는 아궁이가, 다른 한쪽에는 나무 땔감과 마른 풀이 쌓여 있었다. 케냐 시골에서는 여자아이들이 부엌에서 일하다가 화상을 입거나 연기를 마셔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땔감으로 쓰기 위해 인근 산의 나무를 베어내면서 산이 황폐해졌고 가뭄과 기온 상승이 심해졌다. 이번에 트라보카가 은다로이니 조합원 가정 모두에 기증하기로 한 태양열 충전식 전기스토브는 그런 점에서 꽤 편리하고 안전한 조리도구다. 새로 받은 스토브를 꺼내 보여주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는 스토브로 끓였다며 은다로이니 커피를 우리에게 권했다. 우리 회사는 은다로이니 전체 350가구에 필요한 스토브 중 50개를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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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공에 비가 내리는지 궁금해할 거예요”
케냐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 교통체증은 심하고 생각은 꼬리를 문다. 마틴이 일하는 최신식 쇼핑몰의 커피숍에서 좁은 농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길 끝에 있는 커피 농가의 부엌까지. 그리고 케냐 커피가 배를 타고 멀리 유럽과 미국, 한국의 근사한 스페셜티 커피숍에서 소비되기까지, 커피는 다양한 공간에서 변주된다. 100년 전 카렌의 농장과 오늘날 은다로이니 가공소의 모습에는 놀라울 정도로 큰 차이가 없다. 세상은 혁명적으로 변해왔지만, 이곳은 그 세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런 것을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하는 걸까.
커피를 바라보는 입장과 관점은 다르지만, 커피는 많은 사람의 노력과 도전 속에 공간과 시간의 이질성을 관통하고 커피 거래 구조의 다층적인 면면을 지나 우리에게 온다. 커피는 생산자가 길렀지만 숱한 우여곡절 끝에 그들의 얼굴은 지워지고, 커피를 가공하고 유통하는 브랜드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운다. 그리고 마침내 소비자의 손에는 브랜드만이 크게 인쇄된 컵이 쥐어진다. 커피는, 그리고 우리는 그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것일까. 카렌이 커피 농장을 운영할 때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커피밭을 보며,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중에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응공에 비가 내리는지 궁금해할 거예요.”
▶ 서필훈 커피 리브레 대표. 15년 전 핸드 드립 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시작해 현재는 로스팅과 생두 사는 일을 맡고 있다. 커피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아름다움과 참상, 희망이 한데 뒤섞여 있기는 매한가지다. 한 잔의 커피 뒤에 숨겨져 있는,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4주에 1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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