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은가? 세상에 없던 시장 만들어라

1960년 이후, 가난한 나라 위해 4조3000억달러 투입됐지만 한국 등 일부 빼고 여전히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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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5.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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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의 역설|클레이튼 크리스텐슨 지음|이경식 옮김|부키|472쪽|1만9800원

1970년대 초 한국에 모르몬교 선교사로 파견된 청년 크리스텐슨은 한국인에게 가난은 밥을 먹으려면 자식 교육을 포기하거나 노부모 부양을 외면해야 한다는 뜻임을 알게 됐다. '한 나라가 가난을 벗고 번영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은 이 청년을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저명한 '파괴적 혁신' 이론가로 만들었다.

그 후 '한강의 기적'을 놀란 눈으로 지켜본 그는 또 다른 의문에 빠져들었다. "다른 가난한 나라에선 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1960년 이후 무려 4조3000억달러 넘는 돈이 가난한 나라를 돕기 위해 투입됐지만 한국 등 일부 국가만 빼면 대부분 가난 탈출에 실패했다. 선량한 NGO가 나서서 우물을 파 주고, 학교와 병원을 지어줘도 삶의 질은 쉽사리 개선되지 않았다. 지어준 시설도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화장실 지으라고 돈을 주면 하수도 없이 건물만 덩그러니 짓는 바람에 한 달도 못 가 분뇨로 가득 찼다. 학교를 지어줘도 학생이 오지 않는다. 졸업해도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지원을 '밀어붙이기'라고 했다.

가난을 바로잡는 노력만으로는 번영을 이룰 수 없다는 데 '번영의 역설(paradox)'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번영하는 나라는 각종 자원을 밀어붙이지 않고 끌어당긴다. 한국이 처음 번영의 도약대에 섰을 때 교육열이 불타오른 것은 남이 학교를 지어줘서가 아니다. 여기저기 생겨나기 시작한 회사와 공장이 교육받은 우수한 인재를 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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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구호단체들이 우물 파주고 학교 지어준다고 가난한 나라가 부자 나라 되지는 못한다. 구호 활동보다 스스로 작동하는 시장을 만들어야 번영을 이룰 수 있다. 사진은 아프리카 서부의 부르키나파소 주민들이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번영의 길에 들어선 나라들이 지닌 공통점으로 저자는 혁신을 꼽는다. 단순히 품질과 기능을 개선하는 혁신이 아니라 시장을 창조하는 거대한 혁신이어야 한다. 지난 세기 말까지만 해도 아프리카에 휴대전화 시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인들이 휴대전화를 외면해서가 아니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빈약한 구매력 탓에 수요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비소비(nonconsumption)라 한다. 셀텔 창업자 모 이브라힘은 1998년 이런 비소비를 소비로 바꿔 없던 시장을 일군 인물이다. 소액 전화카드로 휴대전화를 빌려 쓰는 아이디어가 대박을 쳤다. 직원 5명으로 시작한 작은 회사가 2005년 34억달러에 팔렸다. 더 주목할 것은 셀텔의 성공이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번영의 마중물 노릇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후발주자가 뛰어들며 휴대전화 회선은 9억6000개를 넘어섰다. 일자리 450만개가 생겨났고, 관련 분야 기업이 낸 세금은 205억달러에 이른다. 셀텔의 성공은 비소비 계층까지 휴대전화 혜택을 누리게 했다는 점에서 민주적이기까지 하다.

저자가 들려주는 역사적인 시장창조 혁신 사례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포드자동차, 싱어 재봉틀, 코닥 카메라가 보여준 혁신의 효과는 거대했다. 자동차를 위해 도로를 뚫었더니 '깡촌' 아이들이 등교하기 시작했고, 재봉틀 덕분에 옷이 쏟아져나오자 그걸 보관할 옷장을 만드느라 가구산업이 일어났다. 번영의 걸림돌인 부패를 보는 시각도 참신하다. 미국인이 중국인보다 덜 부패한 것은 그들이 중국인보다 더 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미국은 부패의 효용성이 낮기 때문이다. 뒷돈을 주고받기보다 투명하게 거래해야 더 큰 이익을 얻는 사회는 번영한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한국 이야기로 돌아가 번영의 마지막 역설을 공개한다. 1970년대 한국은 이삿짐을 나를 때 리어카 하나면 되는 집이 많았다. 가난했지만 리어카를 끄는 가장의 얼굴엔 웃음이 있었다. 그런데 잘사는 현재의 한국은 자살률이 OECD 평균보다 두 배나 높은 나라가 됐다. 저자는 한국을 번영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꼽았다. 이 당혹스러운 역설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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