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死가 갈리는 순간, 이성보다 직관을 좇는다

노숙자 출신 경력 20년 英 소방관, 교통사고·화재 등 재난 현장에서 어떻게 의사 결정하는 지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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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5.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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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의 선택|사브리나 코헨-해턴 지음|김희정 옮김|북하우스|396쪽|1만6500원

책갈피 사이사이 뜨거움이 넘친다. 화염(火焰)과 열정의 온도다. 키 155㎝, 몸무게 48㎏, 짙은 갈색 머리에 매니큐어 칠한 손톱, 신경과학 박사학위 소지자. 저자 사브리나 코헨-해턴(37)의 프로필이다. 또 있다. 그는 경력 20년의 소방관이다. 영국 웨스트서식스 소방구조대 소방대장으로, 영국 여성 소방관 중 직급이 가장 높다. 책은 재난 대응에 나선 소방관의 뇌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바탕으로 생사(生死)가 갈리는 순간, 인간은 어떻게 의사 결정을 하는가를 좇는다.

극한에 부딪혀 '모든 것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 순간',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건 의외로 이성보다는 직감과 직관이다. 차량 여러 대가 충돌한 교통사고 현장. 저자는 헬멧을 쓰면서 눈으로 현장을 한번 훑는다. 효과적 대응 전략을 마련하려면 사고 규모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두 대가 한 덩어리로 엉켜 있는 곳에 눈이 머문다. 날카로운 쇳조각과 봉들이 삐죽 튀어나와 있다. 피로 엉킨 머리카락이 주인을 잃고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정도의 충돌로 살아남을 사람은 없다는 확신과 함께 다음 차량으로 눈을 돌린다. 뒷자리에 아이들이 갇혀 있다. 엄마는 빠져나왔고 운전석의 아빠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능적으로 아이들부터 구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시체가 있는 차 안에 겁에 질린 채 갇혀 있던 공포로 어린 시절 기억을 얼룩지게 할 순 없다.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 구경꾼에게 경찰관을 보내 저지한다. 사망자 유족이 소셜미디어에서 이 슬픈 소식을 접하게 할 수는 없다. "이 사건에서 나는 대부분의 경우 빠르고 직관적인 의사 결정을 했다. 최선의 행동 방식을 논리적으로 분석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공감(共感)은 소방관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다. 화재 현장에 유모차가 있다. 집에 아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 순간 저자는 화재 피해자의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용의가 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완벽한 타인의 고통이 마치 나의 고통인 양 내 몸속을 관통하는 경험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아내, 화재로 부모를 잃은 어린이…. 공감은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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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의 선택'을 쓴 사브리나 코헨-해턴. 소방관이자 심리학 박사인 그는 "우리의 매일이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날이다. 나는 그 사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며 "모든 것이 뜨겁게 달아오른 절체절명의 순간 인간은 어떻게 결정을 내리는가?"묻는다. /북하우스

저자의 청소년기는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가장 사랑했던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숨졌다. 가족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15세 때 가출했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다리 밑, 빈 건물에서 노숙 생활을 했다. 노숙인 자활을 돕는 월간 잡지 '빅 이슈'를 팔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다. 학교 급식이 유일하게 영양을 섭취하는 끼니인 날이 많았다. 그래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 "당시 내 삶에서 공부는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적어도 공부는 내 것이었다."

18세에 웨일스 소방 구조대에 지원했다. "누군가를 구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소방 구조대의 첫 여성이었다. 동료들은 "소방서에서 여자가 일하는 걸 찬성할 수 없다"며 수군거렸다. "너는 '고추가 없기 때문에' 승진하지 못할 것이고, 승진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상사도 있었다. 그렇지만 버텨냈다. 주경야독하며 카디프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뇌종양이 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긴급 상황에서의 의사 결정과 지휘 기술에 관한 연구로 카디프대학 심사위원 우수 연구상, 미국 심리학회의 레이먼드 니커슨 우수 논문상 및 신진연구자상 등을 받았다. 그가 개발한 의사결정법 훈련 시스템은 영국 전역의 소방 구조 시스템에 혁신을 가져왔고, 여러 나라가 벤치마킹하고 있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고, 수사도 화려하지 않다. 투박해서 단단한 진심이 느껴진다. 화재 진압이 끝나면 소방관들은 진압 과정을 복기한다. "법의학적으로 잘잘못을 아무리 엄밀하고 자세히 따진다 해도, 결국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가 하는 것은 양심에 달려 있다. 우리 자신을 더 개발하고 향상시키도록 채찍질하고, 다음엔 더 잘하려는 의욕을 북돋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원제 The Heat of the 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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