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포스트 코로나’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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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한 사회 혼란이 줄어들면서 ‘포스트 코로나’ 담론이 활발하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 제발 그러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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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하지만 과연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다. 어떤 이는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의 연장선에서 사람들이 타인과 친밀한 접촉을 꺼리고 (카톡이나 페이스북 같은) 비대면 접속 위주로 살 것이라 하고, 또 다른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온라인 세계와 ‘언택트’가 우리 삶을 점점 많이 지배할 것이라 한다. 눈치 빠른 이들은 비대면, 간접 소통, 온라인 강의, 재택근무 관련 주식 투자의 호기라 한다. 이미 그런 분야의 자본이 호황세다. 또 일부는 그간 한국(인)이 ‘헬조선’의 오명 속에 사회적 자존감이 바닥이었지만, 이번 ‘K-방역’에서 보여준 시민의 성숙함이나 민주 정부의 신속·적절한 대응이 세계적 칭송을 받았다며 자랑스러워한다. 다른 편에선 이제 세계화나 도시화, 미국화와 시장화 시대가 저물고 지역화나 공동체, 자급화가 부각됨을 지적한다. 동시에, 공공성이 강한 병원을 민영화하는 등 그간 신자유주의 정부가 해온 일들이 사람 목숨조차 구하지 못함을 지적하며, 이제라도 온갖 안전망 구축이 절실하다 한다.

생각건대, 코로나 사태가 (비록 인식에서만이라도) 시대적 분기점이 된 건 ‘죽음 공포’ 덕이다. 그간 지구온난화니 멸종위기니 하는 절박한 경고가 나와도 온 세상은 무감각했다. 집단 불감증! 하지만 이번 코로나19는 바로 눈앞에서 이웃이 죽고, 확산 속도까지 빨라 대부분 죽음 공포를 느꼈다. ‘포스트 코로나’ 담론들 역시 대체로 이 죽음 공포와 연결된다. 즉, 개인적 생존을 위한 마스크, 물리적 거리, 비대면 접촉, IT 기술의 유용성은 물론 사회적 생존을 위한 공공의료 확충, 재난지원금, 기본소득 등 사회안전망도 중시된다.

그러나 이런 대처 역시 죽음 공포에의 반사적 대응일 뿐, 그 원인 제거는 아니다. 참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해 근본(뿌리)을 봐야 한다. 그간의 근본 논의는 크게 세 갈래다.

첫째, 개발에 의한 서식지 파괴. 이미 알려진바, 자본은 이윤을 위해 대규모 농장·축산·광산·삼림·아파트·공장 등을 개발, 부단히 자연 생태계와 야생동물 서식지를 파괴해왔다. 터전을 잃은 야생동물, 그를 숙주로 삼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다가온다. 마침내 인간도 감염된다.

둘째, 야생동물 상품화다. 사람들이 야생동물을 식용, 약용, 군사용, 실험용 등으로 오·남용하면서 그 생명권을 경시했다. 실험실 실수로 바이러스가 유출되기도 한다. 또 못 먹는 게 없다는 중국뿐 아니라, 아프리카 나이로비 등 세계 곳곳엔 야생동물 고급(?) 음식점이 있다. 동서양 부자들에겐 필수 관광코스다. 이 역시 동물 속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는 또 다른 경로다.

셋째, 지구온난화다. 지난 100년 이상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의 자본운동은 대량의 온실가스를 유발하고 성층권 오존층을 파괴했으며 마침내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를 초래, 한편에선 홍수와 광풍, 다른 편에선 가뭄, 폭염, 산불 등 재앙을 부른다.

동물의 서식지도, 바이러스도 변종된다. 또 빙하나 동토층이 녹아 얼어있던 바이러스가 살아난다. 바다엔 미세플라스틱과 중금속 물질이 쌓였고, 이는 생선 등 해산물을 거쳐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핵무기나 핵발전소는 더 무섭다. 결국, 우리는 ‘집단자살체제’를 스스로 만든 셈인데, 코로나19는 그 한 징후일 뿐이다.

이 ‘집단자살체제’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자본이 주범이지만, (자본이 제공한 노동·화폐·상품으로 먹고사는) 우리 역시 공범이다. 따라서 이는 부패한 독재정권을 민주정권으로 바꾼다고 될 문제는 아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 나오듯, 40년 전 5월의 광주학살은 단순한 신군부의 권력욕망이 아니라, 자본이 군부를 매개로 사회를 순치하는 과정이었다. 1997년 말 ‘IMF 체제’ 역시 그 연장(군부 대신 민주)이었다. 따라서 자본 주도의 집단자살체제를 그대로 둔 채 정부가 기본소득이나 재난지원금으로 시장을 활성화한다고 돌파구가 열릴 리 없다.

오히려 이 ‘불편한 진실’을 정직하게 대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과 생명 가치가 존중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설익은 희망을 논하기보다 우리가 집단자살체제를 주도해온 자본에 협력·적응함으로써 (임금, 이자, 배당, 지대, 보상, 연금 등 떡고물을 받으며) 동조한 공범 행위에 대해 고해성사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친구야, 진짜 문제는 용감하게 마음을 여는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