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묵언]김대중 그리고 임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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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공직을 떠난 임동원을 주시했다. 임동원은 노태우 정권 때 북방외교의 산물인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의 주역이었다. 김대중이 보기에 임동원은 강직하면서도 섬세했다. 자신이 설립한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의 사무총장에 앉히고 싶었다. 1994년이 저물 무렵 비서실장 정동채를 보내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임동원은 김대중이 그냥 싫었다. 빨갱이, 과격분자, 거짓말쟁이가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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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 시인·작가

김대중은 집요했다. 정동채는 세 번이나 찾아가야 했다. 임동원은 슬쩍 김대중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었다. 1995년 새해 결국 동교동 집에 들어섰다.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 김대중은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통일 방안, 즉 햇볕정책의 핵심을 설파했다. 임동원은 감동했다. 십수년 동안 남북문제에 매달려왔는데도 이렇듯 고견을 지닌 인물은 없었다. ‘거목이다. 저런 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면….’ 임동원은 즉석에서 사무총장직을 수락했다.

김대중은 임동원을 얻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백만 원군을 얻었다.” “요조숙녀를 소도둑놈이 훔쳐온 격이다.” “그런 인물을 알아본 나도 대단하다.” 임동원은 예상대로 유능했다. 아태재단 사무총장으로 ‘김대중 3단계 통일론’ 완성에 매진했다. 김대중과 임동원은 서로의 지식이 넓고 깊어서 서로에게 의지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논지에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최종 원고를 놓고는 호텔방에서 1박2일 동안 독회를 가졌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바위처럼 무거웠다.

마지막까지 이견을 해소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통일 단계 설정이었다. 김대중은 남북연합-연방제-완전통일을, 임동원은 화해협력-남북연합-연방제 통일을 주장했다. 임동원은 남과 북의 화해협력이 통일을 향한 중요한 과정이라고 보았다. 숱한 대북접촉에서 체득한 것이었다. 김대중에게도 자신의 통일론은 1970년부터 다듬어온 자부심 자체였다. 결국 임동원은 김대중을 설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대중 3단계 통일론’에는 임동원의 체험과 숨결이 스며들었다.

1997년 12월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김대중이 곧장 북녘을 바라봤다. 그 곁에 임동원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대통령의 의중을 잘 읽었다. 김대중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임동원을 특사로 북에 보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누구인지, 북측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했다. 새벽에 집을 나서려니 아내가 성경을 읽어주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는 여정이었다. 순간순간이 벼랑 끝이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김대중은 관저에서 임동원을 기다렸다. 특사는 늦은 밤 청와대로 들어섰다. 임동원은 김정일에 대한 인상을 말했다. “식견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며 판단이 빨랐습니다.” 김대중의 얼굴이 펴졌다. 77세 대통령이 67세 특사의 손을 잡았다. 한반도의 산하가 어둠에 잠겼지만 대통령 집무실만은 환했다. 분단국가의 특별한 날은 그렇게 잉태되고 있었다. 임동원은 자정이 지나서야 등을 보였다. 유독 키가 작아 보였다. 김대중은 한없이 미덥고 또 한없이 미안했다.

김대중과 김정일은 임동원을 통해 얘기를 나눴다. 임동원의 말과 표정 속에 김대중이 있었다. 김대중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마침내 김대중의 햇볕에 김정일이 외투를 벗었다. 2000년 6월 정상회담이 열렸고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했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의 정상이 서명한 최초의 문건이며, 이를 실천에 옮긴 최초의 합의서였다.

임동원은 외교안보수석비서관,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 청와대 통일외교안보담당 특보로 대통령 곁을 지켰다. 자리가 바뀔 때마다 임동원은 애원했다. “이제 쉬고 싶습니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붙잡았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민족을 생각해야지요.”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사(邪)도 없었다.

“그를 만난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2009년 1월, 김대중의 일기)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바칠 것이 눈물밖에 없습니다.”(2009년 8월, 김대중을 떠나보낸 후)

6·15공동선언 20주년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김대중에게 임동원이 없었다면 6·15선언도 없었을 것이다. 김대중이 뼈라면 임동원은 살이었다. 역사는 두 사람의 동행을 길이 기억할 것이다.

(임동원 인터뷰에 <김대중 자서전> <피스메이커> 등을 참조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