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151] 365일과 36.5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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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5.30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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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 소설가

가까운 지인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자가 격리 중이다. 확진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그래도 좁은 공간에 홀로 갇히는 경험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집단 감염이나 등교 중지 같은 코로나발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고 고통스럽다.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선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내가 겨우 알게 된 건, 모든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믿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바이러스를 이겨낸 사람들에겐 항체라는 훈장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깨진 잔 속의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쏟아진 물 앞에서 운다고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깨진 잔을 치우고 쏟아진 물을 닦는 것뿐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해결책은 내 밖의 과거에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있을 뿐이다. 그걸 믿어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다는 것. 컵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것, 깨진 컵을 주워 담고 쏟아진 물을 닦는 지금이 없는 한, 미래는 허상일 뿐이라는 걸 아는 일이다.

낙천성은 운 좋게 타고나는 것이지만, 낙관성은 훈련으로 키울 수 있다. 애초에 스트레스 받지 않는 낙천성이 아니라, 스트레스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낙관성, 우리가 평생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그것이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좀 더 충만한 인생을 살아낼 수 있다.

위안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일에 가깝다. 공기처럼 늘 내 곁에 머물러 있지만 사라진 후에야 기억하는 많은 것들이 그렇다. 깊은 내 불안 잠재워 줄 존재는 그러므로 '내 안에 존재했던 것들'이다. 이제 나는 세상엔 '기쁨만 넘치는 게' 아닌 슬픔도 함께 있다는 걸 알 만한 나이에 다다랐다. 슬픔이 끝나는 건 슬픔이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내 눈물을 닦아줄 누군가 옆에 있을 때뿐이라는 걸. 제아무리 언택트 시대라 해도 인간의 온도가 차가워지는 건 아니다. 우리에겐 365일 36.5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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