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11년… 관계는 단절됐지만, 삶엔 여유가 생겼네

[뽀뇨아빠의 제주에서 농사짓기] <19>

by

입력 2020.05.30 03:00

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2005/29/2020052902102_0.jpg

2009년 제주에 정착하기 위해 이주하려고 할 때 아내는 '삶에서 도망가려고 하는 것만 아니면 따라가겠다'고 했다. 만삭인 아내와 제주살이를 시작하면서 지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내 소식은 블로그에'.

그로부터 11년, 제주가 많이 바뀌었다. '제주살이 열풍'이 불어 제주시 도심지는 비좁은 곳이 되었고 땅값도 집값도 3배 이상 올랐다. 몇 년간 '다른 삶'을 찾아 이주해온 많은 이들이 경제생활이 어려워져 육지로 되돌아갔다. 생활하수는 넘쳐났으며 주차장이 부족해 불편함은 가중되었다.

그 전에 제주로 온 나는 '관계의 단절'이 내심 좋았다. 아무도 나를 모르기에 어느 정도 나를 보여줄 것인가는 내가 정할 수 있었다. 서울살이 보다 훨씬 여유로웠고 그리고 싶은 것들이 많아 좋았다. 내 삶의 주인 되기. 11년 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이념이었고 지금도 그 삶을 살고 있다. 2018년 7년 동안 다닌 마을기업을 그만두며 농업회사를 창업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관계의 단절'로 생긴 '삶의 여유'는 내게 기록할 시간도 주었다. 그 결과물이 제주살이 책 2권과 매주 발행하는 뉴스레터다. 돌 지난 딸 뽀뇨를 돌보며 일을 한 경험은 내 삶을 더욱더 기름지게 했다. 제주 사는 동안 월급 200만 원 이상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고 창업 이후 운영자금을 더 신경 쓰게 되었지만, 이제는 남과 비교하며 살지 않게 되었다.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다른 경험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내 삶의 가장 빛나는 시간 중 하나는 역시나 제주의 풍경들이었다. 여름철 이호해수욕장의 해넘이를 지켜보는 일은 내 삶을 성숙하게 했고, 무릉리 들판에서 구름을 보는 일은 삶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한때는 제주 사람 딱 3명만 사귀는 게 목표였지만 지금은 마산고, 중앙대, 사회적 경제 등 인연으로 만나는 분들이 늘었다. 너무 힘들어서 사업을 그만 둘까 고민할 때도 주위 사람들이 나를 지탱하겠구나 싶으니 마음이 놓였다.

육지와 섬에 다리를 놓지 못해 아쉬워한 설문대 할망도 있지만 나는 세계와 제주가 이미 초연결사회에 진입했다고 본다. 그래서 요즘은 육지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뽀뇨아빠 소식은 페이스북에'.

좋아요 0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제휴안내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