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 사과받은 노동자 "삼성 광고비 많지만, 언론인의 사명은?"
노조 만들다 해고된 김용희씨 26년 복직투쟁 355일만에 마무리
by 안홍기(anongi)
거의 1년 만에 땅을 밟은 남자의 다리는 흔들렸다. 김용희씨가 삼성그룹 본사가 있는 서울 강남역사거리 교통정보 철탑에 오른 게 2019년 6월 10일. 두번째 여름이 찾아오고 있는 2020년 5월 29일, 355일만에 김씨의 투쟁은 막을 내렸다. 삼성의 사과를 받아낸 것이다.
1990년 6월 삼성그룹에서 노조를 결성하려다 사측으로부터 납치·폭행·공갈·협박을 당하고 거듭 해고된 뒤 26년간 복직투쟁을 이어온 김용희씨는 기어이 승리했다. 김씨를 대리해 삼성과 협상한 임미리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는 "이 발표문만을 공개하기로 합의했다. 더 이상은 말씀을 못 드린다"면서 다음의 내용을 발표했다.
김용희의 농성문제가 삼성과의 양측 합의를 통해 2020년 5월 28일 최종 타결되었으며, 삼성으로부터 고공농성을 조속히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를 통해 명예회복 되었다.
[공개 사과문]
먼저, 김용희님의 장기간 고공농성을 조속히 해결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김용희님은 해고 이후 노동운동 과정에서 회사와 갈등을 겪었고 그 고통과 아픔이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회사가 그 아픔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던 점으로 인하여 그 가족 분들이 겪은 아픔에 대해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조속히 건강을 회복하시길 희망합니다.
삼성
철탑에 걸려 있던 투쟁 깃발을 손에서 놓지 않은 김씨는 119 굴절사다리차를 타고 내려와 양손으로 깃발을 지팡이처럼 부여잡고 한발 한발 힘겹게 내딛었다. 철탑 아래서 그를 도와온 이들은 그같은 모습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119 구급침대에 잠시 앉은 그는 구조대원으로부터 체온 등 간단한 검사를 받고는 이내 방역마스크를 썼다. 내려와 마이크를 잡고 한 첫마디도 "철탑 위가 가장 안전하다. 나는 코로나19 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놓으셔도 된다"였다. 김씨는 병원으로 옮겨지기 전 농성을 도운 이들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감사를 전했다.
"'날 살리러 온 사람들에게 아픔주지 말자'면서 버텼다"
김씨는 "철탑 위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며 "'나 하나 떨어져 죽으면 우리 가족들 보상금 정도는 주겠지', 수 없이 제 자신과 싸우고 (죽을) 날짜를 선택하고 그랬다"면서도 "우리 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 각 단체에서 연대해오신 동지님들이 한 명 두 명 모일 때, '나를 살리고자 강남역을 찾아 연대를 해왔는데, 그들의 눈에 눈물 나게 하지 말자, 아픔 주지 말자' 하면서 버텨왔다"고 감사를 표했다.
김씨는 농성장 밑에서 천막을 치고 상주하면서 도와준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를 표했다. 김씨는 이어 삼성물산의 재개발 추진에 따른 강제철거 피해를 호소하는 과천철거민대책위, 암이 발병했지만 적정 보험금을 받지 못한 '보험사에 대응하는 암환우 모임'을 걱정했다.
김씨는 "저는 사실 제 문제보다도 삼성생명 암보험 피해자들 문제가 먼저 선제적으로 해결됐으면 하고 기도하고 기도했다. 지금은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암환우님들 눈을 못맞추겠다. 너무나 속상하다"고 했고, "재개발 재건축 과정에서 하루 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린 과천 철거민들은 17년째 삼성물산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삼성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언론인 어려분께서 관심을 많이 가져주십사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1993년 1차 해고무효소송 항소심을 맡은 변호사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재판부에 김씨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은 채 패소판결이 내려졌던 일을 언급한 김씨는 "문재인 정권의 노동자 정책은 어디로 갔느냐.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회사들이 손쉽게 정리해고의 칼을 휘두르고 있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문 대통령을 향해 "정치적 신념을 갖고 안전재해,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목숨값을 기계값, 부품값보다 못하게 여기는 고용주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꿔내야 한다"며 "이번에 중대 재해를 낸 기업주를 처벌하는 법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이어 "대한민국만큼은 노동자가 건강하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제도를 문재인 정권 임기 동안에 그 초석을 다져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언론을 향해서도 "물론 삼성 그룹이 광고비 많이 줍니다. 그렇지만 언론인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이냐"며 "아직도 사회 곳곳에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마시고, 펜으로 국가권력, 자본권력에 경각심을 줄 수 있는 그런 언론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당원 맞이한 심상정 "살아 내려와서 정말 고맙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당원인 김씨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찾아왔다. 심 대표는 "어제 김용희 당원으로부터 삼성과 최종 합의했다는 전화를 받고 논물이 왈칵 쏟아졌다"며 "승리해서 내려오게 돼 정말 다행이다. 살아서 내려오게 돼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심 대표는 "오늘의 승리는 무노조 황제경영으로 노동 기본권을 차단했던 삼성의 높은 담벼락을 허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삼성이 사람답게 일하고 사람답게 대접받는 곳으로 거듭나도록 함께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성애 고공농성공대위 집행위원장은 "고공농성의 355일은 '무노조 삼성'의 노조탄압을 전 세계에 알린 기폭제가 됐다. 뉴욕타임스, 독일 공영방송 ARD, 영국의 BBC 등 세계 유수의 언론이 삼성의 노조탄압을 알렸다"며 "동남아와 유럽을 포함해 삼성이 진출한 해외에서 노조 탄압을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투쟁할 수 있는 희망을 안겨줬다"고 평가했다.
하 집행위원장은 또 "오늘로 고공농성은 마무리되지만, 이 투쟁의 승리로 '삼성에서 노조하자'는 구호는 이제 상식이 될 것"이라며 "이번 승리가 이끌어낼 더 큰 승리의 물줄기를 보며 노동자가 주인되는 참 세상을 위해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