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먼지가 된 노동자, 그 빈자리를 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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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창비 | 620쪽 | 2만원

“이것은 유년기의 추억이 깃든 내 고향의 이야기이며 동시대 노동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 소설을 한국 문학의 빈 부분에 채워넣으면서 한국 노동자들에게 헌정하려 한다.”

소설가 황석영(77)이 장편 <철도원 삼대>로 돌아왔다. 한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근현대사 100년을 조명하는, 책 제목처럼 ‘철도원 삼대’의 이야기다. 구상부터 집필까지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평양에서 만난 한 노인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출발점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 황석영은 1989년 방북했다. 북한 당국의 안내로 방문한 평양백화점의 부지배인이었던 노인은 ‘옛날식 서울말’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고향은 서울 영등포라고 했다. 영등포는 황석영과 가족이 1947년 평양을 떠나 월남해 정착한 곳이자 그가 유소년기 대부분을 보낸 곳이었다. “그와 나의 영등포에 대한 추억은 둘 사이에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이로, 그는 전국노동조합평의회 소속 철도 기관수로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이다.”(‘작가의 말’에서)

노인은 철도 기관사로 대륙을 넘나들었다. 그의 아버지도 영등포 철도공작창에 다녔고, 그의 아들은 전쟁이 터지자 단기속성 과정을 마치고 기관사가 돼 낙동강전선의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투입됐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철도원 삼대’였다. 황석영은 “나는 이 이야기를 쓰려다가 그만두거나 다음으로 미루곤 하면서 삼십여년의 세월을 보냈다. 아마 당시 나이로 짐작건대 그는 이미 작고했을 것이다”라고 썼다.

노인의 아버지는 어린시절 철도를 처음 보고 한눈에 빠져든 노동자 ‘이백삼’으로, 철도 기관사로 광활한 만주 땅을 오갔던 노인은 이백삼의 아들 ‘이일철’로, 노인의 아들은 월북한 아버지를 찾으러 집을 나갔다가 반공 포로가 돼 돌아온 일철의 아들 ‘이지산’으로 소설 속에서 되살아났다.

소설은 영등포의 한 발전소 공장 굴뚝 위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해고 노동자 ‘이진오’의 일상으로 시작한다.

그는 철도원 이백삼의 증손자로, 한 달 전 깊은 밤중에 아파트 16층 높이 굴뚝에 올랐다. 동료들이 굴뚝 아래서 밧줄로 올려주는 물과 음식으로 생존하고, 그 빈 그릇과 페트병에 대소변을 해결해 내려보내는 일상이 반복된다. 굴뚝 위의 시간이 흐르고 계절도 여러 번 바뀌지만, 그를 높은 곳에 오르게 한 회사는 시종일관 ‘무반응’이었다. 해고 노동자들이 상대할 회사의 ‘주인’이 명확하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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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 100년 노동자의 삶을 그린 황석영 작가의 <철도원 삼대>가 출간됐다. 창비 제공

근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이 반영된 소설 드물어
그들의 꿈이 어떻게 변형되고 일그러져 왔는지
지난 100년을 추적, 삶의 뿌리 드러내고 싶었다

소설 밖 현실에서도 자주 그러하듯, “노동자를 해고하고 회사를 매각한 뒤에 해외로 공장을 옮기고 현지에서 노동자를 고용하여 다른 회사로 탈바꿈하는 뻔한 꼼수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진오는 “지난 다섯 해의 복직투쟁 기간 동안 수백번 외친 이름이었으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얼굴도 인상도 모르는 상대”였던, 회사의 소유주 ‘조태준’을 생각하다 굴뚝 한편에 놓인 빈 페트병에 매직으로 다섯 명의 이름을 쓴다. “그는 조태준에 버금가는 자기편의 이름들을 그 물체에 붙여주고 싶었다.” ‘깍새’ ‘진기’ ‘영숙’ ‘주안댁’ ‘금이’. 그의 증조할머니·할머니거나 어린시절의 동무, 노조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이들의 이름이었고, 모두 죽은 자들이었다.

소설은 이진오가 페트병에 쓴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불러내 이들에게 말을 걸면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전개된다. 이백삼-이일철-이지산-이진오로 이어지는 한 가문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일제강점기 항일독립투쟁부터 현 시기 노동운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싸워온 노동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 근현대문학에서 “근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한 소설이 드물다”는 작가의 문제의식이 반영됐다. “한반도에서 지난 백여년 동안 살아온 노동자들의 꿈이 어떻게 변형되고 일그러져 왔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 나는 우리 문학사에서 빠진 산업노동자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근현대 백여년에 걸친 삶의 노정을 거쳐 현재 한국 노동자들의 삶의 뿌리를 드러내보고자 했다.”(‘작가의 말’)

반세기 가까이 글을 써온 원로 작가는 소설을 집필하면서 실제 408일간 굴뚝농성을 해온 파인텍 노동자 차광호를 만나고, ‘옛 증기기관차 시대 기관수’부터 시작해 철도에서 평생을 보낸 노인을 만나 당시 이야기를 듣는 등 구체적이고 생생한 증언을 채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차광호가 실제 굴뚝 위에서 강낭콩을 심어 수확했던 것처럼 이진오가 굴뚝에서 상추 씨앗을 심어 키우는 점이라든가, “크레인의 운전실을 숙소로 삼아” 농성을 한 ‘조선소 용접공 영숙이 누나’ 이야기는 최근 몇 년 새 벌어졌던 실제 사건과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황석영은 “수많은 자료에 등장하는 한국사의 유명한 인물을 등장인물로 하기보다는 그 속에 이름 석 자로 남아서 사건의 먼지 같은 부분이 되어버린 노동자들에게 주목했다”고 했다.

책을 펴낸 출판사 창비는 당초 28일 <철도원 삼대> 출간 기자간담회를 열기로 했지만, 간담회 당일 황석영 작가가 연락이 두절되고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취소됐다. 창비는 다음주 취소된 간담회를 다시 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