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남성 중심 서사 뒤집는 최초의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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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이은선 옮김
이봄 | 524쪽 | 1만7000원

티탄족 최고의 신인 태양신 헬리오스를 아버지로,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를 외할아버지로 뒀지만 그는 고작 ‘님프’였다. 타고난 힘이라고는 미모뿐이어서, 남신과 결혼을 통해야만 신들의 모임에서 한 자리 꿰찰 수 있는 하급 여신 님프. 그런 그가 신화 속에 이름을 새길 수 있었던 이유는 재앙이라 불리는 능력 때문이었다. 사람을 짐승으로 변신시키는 마법 덕분에 그는 서양 문학사 최초의 ‘마녀’가 됐다. 유혹과 파멸의 대명사 ‘키르케’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마녀란 이름 안에 갇혀, 오랜 시간 소거됐던 키르케의 목소리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무려 3000년 만이다. 고전과 글쓰기를 결합해 대중적 인기를 누린 미국 소설가 매들린 밀러의 새 소설 <키르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 속 조연 중의 조연에 머물렀던 키르케를 주인공으로 데려온다. <오디세이아>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드는 악녀이자 마녀인 키르케를 묘사하면서도 정작 ‘왜’에는 관심이 없다. 남성 영웅의 서사 속에는, 남성들을 두려움에 빠뜨리는 능력을 가진 여성 ‘마녀’의 이야기가 자리할 공간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밀러는 이 ‘최초의 마녀’에 매료돼 처음부터 ‘여성 서사시’를 만들기로 작정하고 <키르케>의 집필에 들어갔다.

프로메테우스, 헤르메스, 다이달로스, 오디세우스까지 익숙한 신화 속 인물들은 소설을 통해 키르케의 동반자로 다시 태어난다. 은총과 응징, 이분법적인 신화적 세계를 벗어나 이해에 기반한 대화를 나누고, 대가 없이 타인을 돕는 키르케의 모습은 기존의 남성 중심 서사를 뒤집는 ‘여성 서사’가 도달할 수 있는 새 지평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영국 ‘여성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이 책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HBO MAX에서 8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