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한 발 더 나가 겨눈 ‘정치적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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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지음·안준범 옮김·이정우 해제
문학동네 | 1300쪽 | 3만8000원

“1990~2010년 미국 정당체계는 다중엘리트체계에 가까우므로, 고학력 엘리트들은 민주당 친화적이고(브라만 좌파), 상위 소득 및 자산을 보유한 엘리트들은 공화당에 더 친화적이다(상인 우파). 어쩌면 이 체계는 민주당 내에서 서로 다른 차원의 엘리트들이 재결합하는 계급주의체계로 기우는 중일 수도 있다.”

왜 좌파정당은 고학력자들의 정당이 되었을까?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목격되는 현상이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부자들 정당으로 여겨지는 공화당에 대한 ‘저학력 백인 노동자’의 지지를 두고 인종주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감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반면 좌파정당이 ‘노동자들의 당에서 고학력자들의 당으로’ 변하는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국 총선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확인됐다. 이러한 글로벌 상황의 배경적 원인이 되고 있는 ‘불평등’ 문제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책이 나왔다. 2013년 <21세기 자본>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 논의를 촉발한 토마 피케티의 신작이다.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21세기 전 세계가 당면한 한층 심화된 불평등의 근원을 무수한 정치·사회·경제적 역사 자료와 통계들을 통해 살펴보고, ‘더 정의로운 미래사회’를 향한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고대부터 21세기까지 시대를 넘나들면서, 프랑스·영국·미국 등 서구 선진국뿐만 아니라 인도·러시아·브라질·이란·중국·일본 등 전 지구를 망라하는 엄청난 규모의 기획이다. 10만부 넘게 팔린 전작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초판만 1만부를 찍었다고 한다.

독자들에게 기쁜 소식은 책에 수식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경제학 책보다는 종합 사회과학도서로 읽힌다. 나쁜 소식은 한국어판의 경우 전작보다 500쪽이 늘어 1300쪽에 이른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서론에서 “성급한 독자들은 곧바로 종장과 결론으로 넘어가고 싶어할 것”이라고 선수를 쳤다. 실제 1~3부에서 논의되는 요소들이 4부에서 하나둘 조립되며 의미가 확장되긴 하지만, ‘벽돌책’의 압도적 분량이 부담스럽다면 프랑스와 영미 사례를 중심으로 훑으며 4부와 결론에 도달해도 될 것 같다. 참고로 아마존 전자책 단말기 ‘킨들’에서 독자들이 <21세기 자본>을 전체 800여쪽 중 평균 26쪽을 읽었다는 분석이 있다.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생각보다 잘 읽히기 때문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겠다.

<21세기 자본>이 자본주의에 내재한 불평등의 경제적 요인을 분석했다면,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선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요인을 분석 중심에 둔다. 책에선 ‘불평등주의체제’와 ‘소유주의 이데올로기’라는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역사 속 다양한 사회들을 종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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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끼리 곡선’은 지난 30년간 세계 전체의 소득성장이 어떤 계층에서 일어났는지 보여준다. 가로축은 70억 인구를 소득 크기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배열하고, 세로축은 소득성장률을 나타낸다. 중하위층은 성장률이 높은데 중국·인도의 고성장을 반영한다. 최상위층인 10%, 1%, 0.1%의 부자들은 다른 어떤 계층보다 높은 소득성장을 실현해 코끼리가 갑자기 코를 쳐드는 모양의 그림이 나타난다. 그래프 위는 특권층 성직자와 귀족, 수탈의 대상이었던 평민으로 구성된 프랑스 ‘앙시앙레짐’을 표현한 그림(왼쪽)과 번영 이면에 극심한 불평등이 존재했던 프랑스 ‘벨에포크’ 시대를 그린 피에르 빅토르 갈랑의 ‘막심의 술집’(오른쪽). 문학동네 제공·프랑스국립도서관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나라는 저마다 불평등하며, 그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 피케티가 주목하는 것은 역사상 도처에 있었고, 아주 오래 존속한 불평등체제인 ‘3원사회(3기능사회)’이다. 중세 기독교사회는 ‘사제(기도하는 자들)’ ‘귀족(전쟁하는 자들)’ 그리고 피지배계급인 ‘제3신분(노동하는 자들)’의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온갖 노동을 담당하는 평민들이 없으면 어떤 사회도 존속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토지나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고, 권력에서도 배제된다. 3원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은 프랑스혁명 전야에 소집된 ‘3부회의’에서 볼 수 있다. 당시 토지의 대부분은 귀족과 성직자들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 두 계급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대신 토지를 갖지 못한 농민들이 몽땅 부담을 지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고 있던 불평등한 체제의 모순이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폭발했다.

책에서 프랑스혁명에 대해 다른 깨달음을 주는 지점은 ‘소유권’ 문제다. 당시 엘리트 계급의 절대권력을 중앙집권국가로 이전하는 평등은 이뤄졌지만, 소유의 광범위한 재분배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 초월성에 의지했던 ‘3기능’ 도식이 무너진 자리를 ‘소유권’에 대한 절대적 존중이 채운다. 사적소유를 신성불가침으로 간주하는 ‘소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출현이다.

피케티가 ‘소유자사회’라고 이름 붙인 근대의 끝자락에는 ‘벨에포크(1880~1914년)’ 시기가 있다. 문화와 예술이 꽃피운 ‘좋은 시절’이다. 놀라운 사실은 프랑스에서 상위 1%의 부자가 사적소유에서 차지한 비중이 1800~1810년 대략 45%였는데, 1900~1910년에는 55%에 근접하면서 혁명 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평등 이념을 주창한 혁명이 돌고 돌아 불평등을 확대했다는 아이러니다. 이러한 모순 역시 1·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을 맞았다. 20세기 들어서면서 볼셰비키 혁명과 양차 대전, 유럽 사민주의사회 출현 등을 거치며 세계의 불평등은 역사적으로 가장 완화된 형태를 띠게 된다.

하지만 피케티는 1980년대 이후 증대된 오늘날의 불평등이 1차 대전 발발 직전 최악이었던 ‘벨에포크’ 시기와 비슷하다고 진단한다. 뉴딜정책과 소득·자산에 대한 강력한 누진세가 불평등을 완화하고, 경제적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20세기 중반 이후 ‘소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다시금 부상한 결과다.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의 ‘보수혁명’이 소환한 신자유주의 시대다.

피케티가 3기능사회와 노예제사회부터 소유주의·식민주의·사민주의·공산주의 사회를 거쳐 하이퍼자본주의사회와 포스트공산주의사회까지 섭렵하면서 가장 강조하는 대목은 ‘정치’다.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여러 선진국의 정치와 선거가 비슷한 모습으로 변화해온 것을 발견한다. 과거 하류층이 지지하던 좌파정당들이 더 이상 그들의 지지를 받지 않고, 오히려 과거 보수정당을 지지했던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피케티는 이들을 ‘브라만 좌파’라고 부르는데 한국의 ‘강남 좌파’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여전히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상위 소득 및 자산 보유자들은 ‘상인 우파’로 명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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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피케티 © AFP, JOESL SAGET

‘21세기 자본’ 후속작 낸 피케티
브라만 좌파·상인 우파의 이익 공동체
불평등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 지목
부의 축적을 제한하는 누진 소유세 등
참여사회주의 실험, 대안으로 제시
‘불평등의 탈정치화’에 맞바람 될까

이는 인민 계급이 자신들을 대변하지 못하는 좌파정당들로 인해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좌파정당들은 고학력자들과 같은 다른 사회적 집단으로 돌아섰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 공교육을 통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이룬 이들이 교육을 통한 해방과 지위 향상을 강조하는 좌파정당에 고마움을 느낀 것이라는 분석도 더해진다. 결국 왕년의 노동자들 정당이 교육제도의 승자들 정당이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는 상보적 존재다. 둘 다 비싼 대가를 치러야 입학이 가능한 명문대학을 통해 특권을 대물림하며, 세계화를 통한 수혜를 가장 크게 누리는 집단이다. 이들은 평등한 기회를 통해 지위를 얻었다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도 공유한다. 선거에선 이들 두 집단이 번갈아가며 집권하거나,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결합하는 식의 연합도 이뤄진다. 결국 두 집단이 다중엘리트체계를 이루며, 과거의 ‘3원사회’로 회귀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피케티는 심화된 불평등을 돌파하기 위해 참여사회주의 실험을 제안한다. 핵심은 부의 대물림을 제한하는 ‘사회적 일시소유’의 개념이다. 각 세대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지만, 다음 세대는 상당 부분을 공동체에 반환해 자본의 순환을 가능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억만장자들의 부가 수십년간의 기초연구와 공적자금, 법률과 조세제도의 혜택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결코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다.

그는 누진세 3종 세트를 제안한다. 상속세와 소득세 등에서 최고 70~90%에 달했던 세율로 돌아가 극단적 소유 집중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중반 세율이 높았음에도 전례없는 고도성장기였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또한 연간누진소유세를 도입해 자산소유에 대한 세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상속세는 죽어서야 내기 때문에 재분배 효과가 제한적이며, 거액의 상속세를 한꺼번에 내는 부담을 지느니 수십년에 걸쳐 연간 납세하는 것이 낫다는 제안이다. 그 외 세계 차원의 금융등기부, 사회연방주의 등 발상을 전환하는 다양한 제안들을 던진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였다”고 썼다. 피케티는 이를 “오늘날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이데올로기 투쟁과 정의 추구의 역사였을 뿐”이라고 다시 쓴다.

피케티의 이번 야심찬 기획을 두고 반응은 엇갈린다. 특히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지난 3월 뉴욕타임스 서평에서 “흥미로운 포인트가 있다”면서도 “책의 메시지가 뭔지 모르겠다”는 박한 평가를 내렸다. 다만 피케티도 결론에서 “내 결론 일부에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느끼는 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며 “토론을 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책에는 오늘날 정치상황에 대한 분석이나 소유세에 대한 제안 등 흥미로운 지점이 여럿 있다. 한국에서 다시 한번 ‘피케티 열풍’이 불게 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