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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이 나온다면 최후의 한 방울 영양가까지 압출해내 모두 소진시키는 우를 계속 범할 것인가, 아니면 재난을 통해 얻은 교훈으로 더 늦기 전에 지속가능한 미래로 방향을 틀 것인가. <언더워터>에서 심해에 건설된 시추기지의 엔지니어 ‘노라’ 역을 맡은 크리스틴 스튜어트.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

지구의 ‘마지막 혈액’ 한 방울까지 빨아먹다가 당한 일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가장 깊은 해저 시추기지 붕괴탈출해야 하는 인간들의 사투초반 5분 재난상황 직행하는데위험 도사린 공간들 설명 부족불 꺼진 미로가 되어버린 흐름‘에일리언 시리즈’ 뒤따르다가영화 속 탐욕에 따른 재난처럼과거 성공요인 ‘과욕의 짜내기’

한 유명 해외영화 사이트에 게재된 ‘코로나19로 인해 개봉 일정이 늦춰지거나 취소된 영화들’의 리스트가 길어지다 못해 모니터 베젤 하단을 뚫고 내려갈 기세인 요즘인지라. 어느덧 그 기억조차 희미해져 가고 있는 ‘블록버스터’스러운 분위기에 가장 근접한 영화라 할 수 있는 <언더워터>에 대한 감별.

일단 이 영화는 거의 10년 전에 만들어진 국내 미개봉 영화까지 개봉되고 있는 이 창고대방출적인 시기에 놀랍게도 해외에서도 2020년 1월에 개봉된 영화, 그러니까 농수산적 메타포를 빌려 말하자면 올해에 도정된 쌀이라 할 영화다. 여기에 더해,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뱅상 카셀이라는 두 배우의 존재는 이 영화의 블록버스터적 색채를 더욱 짙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구에서 가장 깊은 해저협곡인) 마리아나 해구에 건설된 해저 11킬로미터가량 깊이의 시추기지에서 벌어진 갑작스러운 붕괴 사고 및 괴생명체의 내습, 그리고 이 기지에서 탈출하려는 기지 근무자들의 사투’라는 <언더워터>의 기초설정은 대형 스크린과 고성능 음향시설, 그리고 빛이 차단된 어두운 감상환경이라는 극장의 조건에 매우 잘 부합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이 영화가 이미 3년 전에 촬영을 마친 영화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또다시 농수산적 메타포를 빌리면 이 영화는 2017년에 수확, 2020년에 도정 및 포장을 한 쌀의 형국이라는 얘기다. 대체 이 3년 개봉 지연의 영문은 무엇인가? 더구나 1월은 할리우드가 묵은 재고를 방출하는 시기라는 흉흉한 학설이 업계에서 은밀히 돌고 있다는 점까지 생각한다면(물론 모든 1월 개봉 영화가 그런 것은 아니다) 흠… 좌초 유조선에서 유출된 원유 기름띠 같은 불길함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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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을 아무리 합하고 곱한들…

일단 털고, 계속하자면, 위에 적은 영화의 기초설정과 이 영화의 주연이 크리스틴 스튜어트(기지의 기계 엔지니어 ‘노라’ 역)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굳이 엄청난 영화팬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가 <에일리언> 시리즈(<프로메테우스>까지 포함한)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음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네거티브 필름’처럼 처리된 신문기사/설계평면도/엠아르아이(MRI) 이미지 등등을 빠르게 훑는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은 ‘‘티안 산업’이라는 거대기업이 각종 위험과 사고와 의혹을 덮어가면서 심해시추를 강행하고 있다’라는, <에일리언> 시리즈의 ‘웨일랜드-유타니 코퍼레이션’의 행태를 다분히 연상시키는 기본배경을 브리핑한다.

이어 영화는, 심해에 우뚝 선 시추시설을 따라 내려가 해저면에 건설된 심해기지 외부를 보여준 다음, 기지 중심점에서 360도 패닝하는 카메라로 <에일리언> 1편의 우주화물선 ‘노스트로모’호의 통로를 다분히 연상시키는 기지 내부 복도를 훑어준다. 그리고 <에일리언 3>의 욕실/의무실의 향취 물씬 풍기는 욕실에서, 맨머리 삭발을 감행했던 <에일리언 3>의 시고니 위버(‘리플리’ 역)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짧은 머리를 두피에 밀착시킨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버스트숏으로 잡는다. 더구나 ‘노라’는, 아니나 다를까 스포츠브라 차림이다. 다만 <에일리언> 1편의 ‘리플리’의 속옷 차림에는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알리바이가 있었던 반면, 노라의 스포츠브라에선 그저 생활습관 또는 단순취향 정도의 알리바이 외에는 찾기 어렵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얼마 뒤에 등장하는 “수중 슈트를 입으려면 바지를 벗어야 돼”라는 민망한 대사는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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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

이쯤에서 눈치 빠른 관객들이라면,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이미 훌쩍 낮춰 잡았을 것이고, 하여, 이어지는 장면들이 명명백백히 천명하는 <에일리언> 추종 및 재활용에 대한 의지를 오히려 응원하는 입장이 될 것이다. 하긴 그렇다. 그것만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상당한 성취일 것이다. <에일리언> 1, 2편의 드높은 완성도와 여전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다음 영화는 아무런 사전 정지 작업이나 예고도 없이 곧바로 긴박한 기지 붕괴 장면으로 돌입한다. 지금까지의 에일리언 추종 영화들이 초반에 ‘차근차근 캐릭터 소개’라든가 ‘인물 간 갈등 묘사’ 등의 원전에 충실한 사전 정지 작업에 충실하고도 실패했으므로, 나는 그런 지루한 시간낭비 안 할래, 라는 듯한 이 전개는 나름 박력 있다. 기대감까지 얼핏 품게 할 정도다.

이런 <언더워터> 초반 5분의 ‘치고 들어가기’는 아마도 이 영화가 또 하나의 핵심 교본으로 삼고 있는 <그래비티>(2013) 초반 전개의 영향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비티>의 ‘라이언’(샌드라 불럭)과 ‘맷’(조지 클루니)이 본격 재난상황 돌입 전까지 10분 동안 주고받은 대사의 밀도와 캐릭터의 풍부함은, ‘노라’를 포함한 <언더워터>의 모든 대사와 캐릭터 개성을 전부 합하고 곱하고 제곱에 제곱을 거듭해도 달성되지 않는다. 0의 합과 곱과 제곱은 아무리 거듭해도 결국 0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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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거면 처음부터 잘 설명하든가

결정적으로 <언더워터>가 도입부의 ‘치고 나가기’로 희생시킨 것은 공간에 대한 설명이다. 영화는 사고 상황 이후 인물들이 수행할 핵심 미션으로서 <에일리언 2>, <그래비티>, 그리고 <클로버필드> 같은 영화들이 공히 채택하고 있는 이야기 틀, 즉 ‘A지점(시추본부 ‘케플러 기지’)에서 B지점(시추지점 ‘로벅 기지’)으로 이동 후, 모종의 이동수단(탈출용 ‘포드’)을 통한 지옥탈출’이라는 틀을 채택하고 있다. 이 경우 공간은 말 그대로 또 하나의 주인공이 된다. 영화 속 인물들이 돌파해 나가야 할 공간의 구조와 각 지점들의 특성, 그리고 여기에서 예상되는(그리고 예상되지 않는) 위험이나 난관들은 인물들에게 거의 운명에 준하는 수준의 영향력과 구속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공간은 극적인 전개에 맞춰 세심하게 설계돼야 하고, 또 그렇게 설계된 공간의 얼개는 관객들의 머릿속에 혼란의 여지 없이 깔끔하게 그려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객은 뭐가 뭔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불 꺼진 미로에 던져지게 된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여 수많은 영화들이 이러한 내용을 국어책 읽듯 줄줄 브리핑하는 촌스러운 장면들을 넣곤 하게 된다. <언더워터>가 과감한 치고 들어가기를 통해 이런 촌스러움을 피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영화는 더 큰 실수, 즉 관객을 미로에 빠뜨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긴 영화는 전반부에서 ‘일단 무조건 여기서 탈출’이라는 과제에만 집중하고 그 결과, 붕괴로 막힌 통로, 고압 수증기 뿜어대는 복도, 화물 카트 운행되는 선로 등등의 공간들을 연달아 ‘갑툭튀’풍으로 나열한다. 이를 마주친 인물들은 별다른 액션이나 반전이나 정서 없이 그 과제들을 그냥 열심히 고생스레 통과해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가 공간설계 및 해설 같은 거추장스러움을 건너뛴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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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

그러나 인물들이 어딘가를 향해 계속해서 전진하는 만큼, 영화는 결국 목적지와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영화는 뒤늦게 중간중간의 ‘기착지점’마다 인물들이 다음 공간으로 이동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그 공간의 특징에 대한 설명을 투입한다. 이러한 때늦고 난삽한 설명은, 그 자체로 붕괴현장 같은 이 영화의 혼란상을 해소하지 못한다. 저럴 거면 처음부터 잘 설명하고 들어가지, 라는 한탄을 자아낼 뿐.

사정이 이러하니 인물의 개성이라든가, 정서적 설득력이라든가, ‘크리처’의 참신함이라든가, 세계관의 울림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어떨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실 것이다. 이 영화의 인물/전개/설정 등등 모든 것은 <에일리언> 시리즈나 <그래비티> 등 자신이 흠모하는 영화들의 유명한, 그리하여 수많은 영화들에서 참고되고 인용되고 중탕된 결정적 장면들을 ‘나도 한번’풍으로 재현하는 데 맞춰져 있고, 그 결과는 예상하시는 그대로다(그중 “게임 오버라고, 게임 오버!”라는 징징 대사로 유명한 <에일리언 2>의 떠버리 ‘허드슨 상병’(빌 팩스턴)을 재현하려 했던 듯한 ‘폴’(T.J. 밀러)이라는 캐릭터가 안기는 허탈감은 단연 압권이다). 그 재난의 현장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 뱅상 카셀 같은 배우들의 존재감과 연기가 “제곱인치당 8톤의 수압”에 눌린 듯 납작한 평면으로 눌려 거의 눈에 띄지 않음은 물론이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깊이 11킬로미터 심해까지 들어가 지구의 마지막 혈액 한 방울까지 빨아내려는 탐욕으로부터 비롯된 영화 속 재난처럼, 과거의 성공에서 마지막 한 방울 혈액까지 압출해내려는 주최측의 과욕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영화들의 대표선수라 할 <에일리언 vs 프레데터>를 필두로 이 영화까지 기나길게 이어지는 리스트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점이겠다. 이윤이 나온다면 최후의 한 방울 영양가까지 압출해내 껍질만 남기고 모두 소진시키는 우를 계속 범할 것인가, 아니면 재난을 통해 얻은 교훈으로 더 늦기 전에 지속가능한 미래로 방향을 틀 것인가.

그렇게 <언더워터>는 이 엄혹한 코로나의 시대에 실로 부합하는 메시지를 전혀 본의 아니게 던지고 있다.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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