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세 박사의 K상담실]“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엄마로부터 독립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너무나 완벽한 엄마인데, 자꾸 짜증이 나고 비뚤어지고 싶어요

▶금주의 내담자

(21) 영화 ‘나의 마더’의 딸

인류 멸종 이후 6만3000개의 인간 배아를 보유한 ‘인류재건시설’에서 태어난 유일한 인간인 딸은 로봇 마더(엄마)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문밖은 전염병이 창궐하는 세상이라 평생 격리생활을 해온 딸은 영상으로 발레를 배우고, <투나잇 쇼>로 유머를 익혔다. 가장 완벽한 엄마인 줄 알았던 마더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던 그날 이후, 모녀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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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진 뒤, 로봇이 유일한 인간인 딸을 기른다는 설정의 SF영화 <나의 마더>. 변변한 이름 없이 ‘딸’로 불리는 주인공이 머지않아 태어날 ‘동생들’인 인간 배아를 바라보는 영화 속 한 장면이다.

딸 = 너무 답답해서 왔어요. 하루 종일 집에만, 그것도 엄마와 단 둘이만 있으려니 정신이 나갈 지경이에요.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엄마에게 짜증을 내게 되네요. 이런 말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비뚤어지고 싶다는 게 제 현재 심정이에요.

김 박사 = 코로나19로 전 세계인이 힘든 상황이지요. 집에 있는 시간이 갑자기 늘어나서 가족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안 그래도 걱정이었습니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돈다는군요. 거의 한 학기를 엄마와 집에서 보낸 초등학생이 ‘코로나가 무서운 이유는 엄마를 괴물로 변하게 해서’라고 했다고.

딸 = 저희 모녀는 다소 상황이 다르긴 해요. 격리생활을 하는 상황은 비슷하다 할 수 있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어요. 제게는 이번이 평생 몇 안 되는 외출이거든요. 어릴 적부터 엄마 이외에는 다른 사람과 놀아본 적도 없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뭔가를 함께한 적도 거의 없어요. 심지어 공부도 엄마에게서 배웠으니까요.

‘감정이 없는 엄마’가 숨막혀요
“인간의 감정은 완벽하지 않지만 제일의 마음 치료제이기도 하죠”

김 박사 =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드문 경우네요. 엄마는 어떤 분이세요?

딸 = 엄마는 … 보통 사람과 아주 다르죠. 어떻게 보면 가장 이상적인 엄마라고도 할 수 있어요. 절대 틀린 말은 하지 않으세요. 이성적으로는 거의 완벽하죠. 게다가 척척박사예요. 제 교육을 전적으로 담당하신다고 말씀드렸듯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갖고 계세요.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말이에요. 아주 꼼꼼하기도 하고, 자상하기도 해요.

김 박사 = 빈틈없는 분이시군요. 혹시 그런 면이 무섭지는 않나요?

딸 =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희 엄마는 절대 화를 내지 않아요. 무섭게 소리를 지르거나, 체벌을 가한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어요. 부드럽지만 권위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래서인지 엄마 말을 어겨본 적이 거의 없어요. 보통은 이견이 생기면 모녀지간이라도 감정이 상하잖아요. 그러면 싸움이 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금속처럼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인 엄마는 절대 싸우는 법이 없지요.

김 박사 =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엄마상이네요.

딸 = 모르는 소리 마세요. 오히려 답답하고 미치겠다고요. 차라리 엄마가 옳지 않거나 화를 냈으면 좋겠다고요. 너무 이성적이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로봇이랑 사는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잘했다, 완벽하다, 100점이네!”라는 칭찬도 좋지만 “얼마나 힘드니? 엄마도 마음이 아프다. 속이 많이 상하고 화가 나겠구나”라는 감정적 위로가 필요하다고요.

소통을 영상으로 배웠어요
“상호 교류의 소통이 어려워지면 자기만의 세계에 빠질 수 있어”

김 박사 = 감정이 없는 엄마. 게다가 완벽히 이성적이라면 숨 쉴 틈이 없겠군요. 충분히 이해해요. 세상이 아름답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완벽하지 않아서죠. 인간은 죽기 때문에 오만하지 않을 수 있듯이. 잘 아시겠지만, 감정은 완벽하지 않아요. 의도와 다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감정 덕분에 서로 활발히 소통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공감이라는 세상 제일의 마음 치료제도 감정의 큰 힘이죠. 그런데 엄마도 본인이 그렇다는 걸 알고 계실까요?

딸 = 네, 엄마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예요. 요즘은 여느 엄마들이 할 법한 농담을 하신다니까요. 물론 어색하고 썰렁하긴 하지만요. 노력을 많이 해도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게 있잖아요. 엄마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기는 참 어려운 거 같아요. 가끔 나도 엄마처럼 감정을 못 느끼고 표현 못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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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의 마더’ 속 로봇 엄마.

김 박사 = 어릴 적 엄마에게 사랑은 많이 받았나요?

딸 = ‘애착 형성’에 관해 궁금하시군요.

김 박사 = 아, 엄마가 이렇게 반응하시겠군요. 내담자께서 제게 한 반응처럼요. 아마 엄마는 내담자가 어떤 의문을 갖게 되면, 바로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을 듯하네요.

딸 = 네, 맞아요. 제가 문제와 맞닥뜨리면, 엄마는 늘 해결책을 주세요. 방법은 여러 가지예요. 학습을 통하거나,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하세요. 아무튼 제 애착 형성을 궁금해하신다는 제 생각이 틀린 게 아니라면 … 제가 사랑을 많이 받았죠.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니 조금 혼란스럽네요. 틀림없이 기억 속의 엄마는 항상 저와 함께했어요. 늘 제 편이었고, 제가 원하는 것은 대부분 들어주셨어요. 매일 밤 자장가를 들려주는 엄마의 품은 포근했어요. 그런데 촉감 같은 느낌은 별로 남아 있지 않네요. 기억 속 장면은 따뜻한 오렌지색인데, 그걸 느낄 수 없다고 해야 하나요.

엄마의 ‘계획대로’ 살아야 할까요
“생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자유 그것을 감당할 책임감이 있어야”

김 박사 = 그럴 수 있어요. 아마 스킨십이 부족해서일 수 있습니다. 애착 형성의 중요한 과정이 스킨십이거든요. 영국의 정신과 의사 볼비(John Bowlby, 1907~1990)의 ‘애착이론’이 있어요. 양육과정에서 부모와의 관계 속에 성장하는 애착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인데요. 어릴 적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해야만 아이가 정서적인 부분은 물론 인생 전반에 걸쳐 안정적이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이론이죠.

딸 = 네, 엄마에게서 배웠어요. 근데 스킨십과 무슨 연관이 있지요?

김 박사 = 볼비의 애착이론을 지지하는 연구가 또 하나 있어요. 심리학자 해리 할로(Harry F Halrow, 1905~1981)는 어린 원숭이를 엄마와 격리시킨 뒤 ‘원숭이 대리모’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연구한 뒤 ‘사랑의 본질(The nature of love)’이라는 논문을 썼어요. 온몸을 철사로 감싸고 우유병을 든 가짜 원숭이와 우유병은 없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헝겊으로 몸을 감싼 가짜 원숭이를 우리에 넣었습니다. 어린 원숭이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허기를 채우느라 철사 대리모의 품에 매달린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헝겊 대리모의 품에서 보냈습니다. 스킨십이 정서적 안정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게 했죠.

딸 = 엄마가 그 논문도 보셨나봐요. 어릴 적 엄마가 저를 안아줄 때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을 느낄 수 있도록 온열장치 같은 걸 썼거든요. 제가 정서적으로 안정되길 바라셨겠지요.

김 박사 = 엄마와 고립된 생활을 하신다면, 사회적 활동은 어떻게 배워가고 있죠? 특히 타인과의 관계 같은 부분을요.

딸 = 엄마 이외에 다른 사람과 접촉하진 못하지만, 나름대로 방법은 있었어요. TV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는 거죠.

김 박사 =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요즘 한국 어린이들의 인기 직종이 ‘유튜버’라고 해요. 동영상 콘텐츠의 가치가 높아졌거든요. 요즘은 지식 습득에서 책보다 동영상의 활용도가 더 높아 보입니다. 책은 글자라는 기호를 통해서 인간의 대뇌 활동을 활발하게 만들지요. 이를 통해 복잡한 인간의 감정이나 대화 속 숨겨진 의미 등 보통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영역을 습득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인간의 시청각을 지배해버리는, 그러니까 당연히 재미있는 동영상들은 직접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니까 상대적으로 대뇌 활동이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동영상 시청이 증가할수록 자극지향적으로 되겠지요.

딸 =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책을 많이 본다고들 하는데, 실제로 전자기기를 이용한 경우 읽은 책의 권수는 더 많았지만, 완독한 경우는 훨씬 적었다는 기록을 본 것 같아요. 정보량이 많아서 좋은 면도 있지만, 그러다보니 깊이가 얕아진다는 결점도 있고요.

김 박사 = 영상물을 보고 타인과의 관계를 배울 경우에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염려가 있어요. 보통의 대화에서는 상호 교류가 일어나잖아요. 내 언행이나 미묘한 감정의 변화에 따라 상대의 반응이 달라지죠. 하지만 동영상은 그런 상호 교류를 할 수 없다보니 소통에 장애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타인과 소통이 어려워지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즘 양육자들이 아이를 달래기 위해 너무 어린 연령부터 동영상물을 보여주곤 하는데, 절대 지나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딸 = 또 하나 문제가 있어요.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한편으로 자꾸 제가 엄마의 계획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이 된 기분이 들어요. 엄마는 제가 최고가 되길 바라세요. 그래야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무언의 압력을 주시죠. 정작 제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제아무리 윤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리고 기능적으로 다른 생명체보다 뛰어나다 해도,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잖아요.

김 박사 = 아무 소용도 없진 않겠지만, 남이 계획해준 대로 사는 것은 껍데기의 삶을 사는 거란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자유라고 하죠. 그 자유를 표현하는 가장 구체적인 주제가 ‘어떻게 살 것인가’겠죠.

딸 = 하지만 박사님, 엄청난 부자거나 엄하고 거역하기 힘든 부모를 만나서 그분들의 계획대로 사는 것이 꼭 나쁘기만 할까요. 양육 환경이 부실해서 생명에 위협을 받는다거나 또는 무책임한 부모의 방임 속에서 자란다면, 그게 더 나쁜 거 아닌가요? 말이 안 되는 비교이긴 합니다만, 이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저는 엄마의 계획에 반기를 들 수 없어요.

김 박사 = 마음이 복잡하죠. 실은 저도 정답은 모릅니다. 다만 자유의 의지가 있고 선택에 합리적인 이유만 있다면,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사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운 좋게도 자신의 선택과 부모의 계획이 일치할 수도 있겠죠. 또 자신의 선택이 아주 엉망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책임감이 있어야 ‘내 삶’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어요? 좀 더 고민해봅시다.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지요.

딸 = 시간이 더 필요하군요. 그럼 지금 당면한 문제부터 풀어야겠어요. 공감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뜻만 고집하는 엄마와 저는 어떻게 해야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김 박사 = 가족치료라는 것이 있어요. 엄마를 제가 직접 만난다면 도움을 드릴 수 있겠지만….

딸 = 그건 불가능해요.

김 박사 =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엄마도 모녀 사이 문제를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우선 공감은 노력을 하면 나아집니다. 그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책이나 영화, 예술품, 자연을 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때 느끼는 감정을 엄마와 나눠 보세요. 그리고 엄마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일단 절망감은 나아질 겁니다. 관계에서의 절망감은 상대가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되거든요. 그렇다고 무조건 엄마를 따르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니라고 생각되거나 이견이 있다면, 표현하세요. 주의할 점은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감정이 격할 때 하는 표현은 싸움이 되기 쉬워요. 격한 감정이 가라앉은 뒤, 본인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세요. 대개 이 정도만 해도 엄마와의 관계가 많이 개선됩니다만, 불행하게도 엄마가 절대 안 바뀐다면 …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어느 날 때가 될 겁니다. 기다리는 동안 내담자께서도 하루가 다르게 자랄 거고요.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성장하다보면 독립의 시간이 오겠죠. 그렇게 ‘둘만의 격리’에서 벗어나면, 엄마와의 갈등은 오히려 애틋한 추억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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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진세

정신과 전문의 김진세 박사는 슬럼프 극복을 위해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길 위의 카운슬러’로 나섰던 천생 상담가다. 고려제일정신과의원 원장으로 20년 이상 진료실에서 상담을 하고, 정신 건강과 관련된 수백편의 글을 써왔다. 저서로 <심리학 초콜릿> <행복을 인터뷰하다> <태도의 힘>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