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지난 밤’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일 밤’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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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승위의 ‘라곰 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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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미국 트럼프 대통령발 ‘가짜뉴스’에 발끈한 스웨덴 사진작가들이 스웨덴인들의 ‘진짜 삶’을 담아 내놓은 사진집 <지난 밤 스웨덴에서>의 표지. 사진집은 발간 직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내졌다.

“지난밤 스웨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봐라! 스웨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대체 누가 믿겠는가? 스웨덴에서!” 2017년 2월18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플로리다주 멜버른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는 도중에 뜬금없이 스웨덴을 트집 잡았다. 그는 파리, 베를린, 브뤼셀 등 이민자 관련 테러가 발생한 몇몇 유럽 도시들을 거론하면서, 스웨덴에서도 정부의 관대한 이민정책으로 무슨 끔찍한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는 듯 말했다. 그것도 바로 지난밤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느긋한 금요일 밤을 보낸 스웨덴 사람들은 “지난밤”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언급에 어리둥절했다. 내가 잠든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밝혀진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출처는 극우 TV 채널 ‘폭스뉴스(Fox News)’의 이른바 ‘가짜뉴스’였다.

트럼프의 ‘가짜뉴스’에, 이웃나라 덴마크의 정치풍자예술가 쇠렌 빌헬름은 ‘스웨덴이 당한 가짜테러’에 ‘스웨덴을 위한 가짜기도’ 행사를 계획했다. 그는 ‘가짜꽃’을 가져와 스웨덴 대사관 앞에 놓고 ‘가짜묵념’을 하고 거리행진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 거리행진 역시 페이스북의 온라인 이벤트였다. 힘센 자의 가짜뉴스를 조롱하는 무척 해학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짜뉴스 피해자인 스웨덴 사람들은 보다 진지한 반응을 보였다. 스웨덴의 유력 일간지 아프통블라뎃은 2월17일 금요일 밤에 실제 일어난 일들을 시간별로 세세히 나열했고, 스웨덴의 국가대표급 사진작가들은 스웨덴 사람들의 ‘진짜 삶’을 담은 사진집 <지난밤 스웨덴에서(Last Night in Sweden)>를 제작했다. 이 사진집은 애초에 가짜뉴스를 퍼뜨린 트럼프 대통령에게 진실을 전달할 인상적인 방법으로 계획되었으나, 스웨덴 사람들의 솔직한 일상이 세상에 공개되는 계기가 됐다. 사진집은 발간 직후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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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집에는 스웨덴인의 삶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 있다. 그러나 이 ‘자신감’은 코로나19 현실에서 가장 느슨한 정책으로 표면화됐다.

사진집을 통해 나도 ‘지난밤 스웨덴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다. 어떤 여자들은 인어공주 복장으로 헤엄을 쳤고, 어떤 노부부는 지하실에 마련된 사우나룸에서 서로의 발톱을 깎아주었다. 감옥에 갇힌 흉악범들은 시간당 1700원을 받으며 세탁 노동을 했고, 어떤 소녀들은 말을 탔다. 스웨덴 방방곡곡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나열된 사진집에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매일의 희로애락이 차분히 담겨 있었다. 삶의 쓸쓸함, 일의 고단함, 그리고 인생의 허무함까지도.

한편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가짜뉴스 해프닝은 지금까지 스웨덴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인식되어 왔는지 잘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조차 스웨덴은 평화롭고 안전한 나라여서, 어떤 끔찍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는 말이 아닌가.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겼을지언정, 사진집이 보여주는 이들의 일상은 소박하지만 남루하지 않고 삶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스웨덴은 평화롭고 안전한 나라이다. 스웨덴은 1814년 노르웨이와의 짧은 전쟁 이후 200년 넘게 전쟁을 겪지 않았다. 세계 양차대전의 소용돌이도 중립이란 이름으로 피해갔다. 같은 북유럽국가라 해도 역사적 경험이 서로 다르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점령당했었고, 핀란드 역시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만만치 않은 고통을 겪었다. 대내적으로도 스웨덴은 1909년 30만명 이상이 참여한 대파업 이후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없었고, 국가비상사태나 그에 준하는 위기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많은 나라에서 흔히 일어나는 정치폭력, 유혈혁명, 군사쿠데타 등도 없었다.

웁살라대학교의 페터 발렌스텐 교수는 지난 100년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스웨덴 사람들이 배운 것은 누구와도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지 않고 적절한 타협 방안을 찾는 것이 합리적이고 결국에는 유익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스웨덴 사람들은 직설적인 감정표현을 피하고, 정면비판을 하지 않으며, 적대적 갈등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스웨덴 사람치고 누구의 의견에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위기와 갈등에 대처하느라 불필요한 힘을 빼는 대신, 스웨덴은 지난 100년 동안 ‘자유, 평등, 연대’라는 사회민주주의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의 기본 삶을 돌보는 갖가지 보편적 복지제도를 성공적으로 발전시켜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인정받았다. 이러하니, 자국에 대한 스웨덴 사람들의 자부심은 ‘국뽕’이라 할 만큼 대단하다. 고백하건대, 나도 스웨덴 국민의 국뽕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해왔다. 그럴 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그렇게 끄덕이던 고개를 자주 갸우뚱한다. 스웨덴이 코로나19에 가장 느슨한 대책을 실시하는 나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는 기를 쓰고 감염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감염되어도 집에서 버텨야 하고, 증상이 심해져서 호흡곤란 지경에 이르지 않고서는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스웨덴에서 위협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던 지난 3월 무렵, 나는 중학생인 막둥이를 한 달 동안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어느 정도 확산이 진정되면 보낼 생각이었는데, 학교에서 공문이 날아왔다. 중학교는 의무교육이므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벌금을 내거나 법정에 서게 되고, 아이는 유급을 당하게 될 거라는 협박성 공문이었다. 함께 사는 가족이 코로나19 감염자여도 아이에게 감염증상이 없으면 아이는 학교에 가야 한다. 아이가 증상이 없는 감염자여서 학교 내 교사나 다른 학생들에게 전파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은 무시한 것이다. 부모가 기저질환이 있어 취약그룹에 속해 있어도, 아이는 학교에 가야 한다.

우리 막둥이를 뺀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간다니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이하 교육기관이 문을 닫을 경우, 의료인 등 현재 사회유지에 필요한 필수인력의 아이들을 돌보기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교 문을 열어야 한다면, 집에 있을 수 있는 아이들에게 온라인수업 등의 지원을 해주면 될 텐데, 누구나 학교에 가야 하는 평등의 가치가 이렇게 실현되고 있다. 평등이 전체주의의 옷을 입은 것 같다. 그동안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아침 일찍 사람 별로 없는 때를 골라서 후다닥 장 보는 것 이외에 거의 집 밖에 나간 적이 없었는데, 막둥이가 학교에 다니니 뒷문 활짝 열어 놓고 앞문에서 열심히 모기 잡는 꼴이 되어버렸다.

요양시설 상황은 더욱 우울하다. 3월 말에 요양시설 방문 금지조치가 내려졌는데, 요양시설에 감염이 확산되어 사망자 중 절반 이상이 요양시설에서 나왔다. 스웨덴 공공보건청 전략이 감염확산을 최대한 늦추면서 노령층 등 취약계층을 중점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라 했는데, 현재까지의 결과는 참담하다. 이유는 뻔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는 요양사가 자신도 모르게 무증상 감염자가 되어 노인들에게 전염시킨 것이다. 증상만 없으면 누구라도 일터나 학교에 갈 수 있으니까.

오늘 날짜로 감염자 수 3만3843명, 사망자 수 4029명. 지난 12일부터 19일 사이 유럽에서 인구대비 사망자 비율이 가장 높았다. 이웃 세 나라 사망자 수를 다 합한 것의 4배에 달하는 수이다. 2017년 2월18일에 트럼프 대통령이 했던 질문을 나도 하고 싶다. “스웨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대체 누가 믿겠는가? 스웨덴에서.”

그런데 왜 스웨덴 사람들은 이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일까? 한국을 포함한 외신들은 모두 스웨덴의 정책은 완전 실패했다고 혀를 차는데, 정작 스웨덴 사람들은 이 높은 사망률에도 여전히 70% 이상 정부의 정책을 지지한다. 지난 4월 스테판 뢰벤 총리가 한 인터뷰에서 “코로나19로 인해 앞으로 수천명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도, 지지율은 여전했다.

사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이런 지지와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에,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전폭적인 신뢰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사망자 비율이 유럽 최고라는데, 왜 이 모양으로 대처하느냐?”고 따져 묻는 스웨덴 언론이 없다. 역사로부터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 게 유익하다”는 걸 배웠다더니, 언론도 국민도 정부의 그 어떤 결정에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 것인가? 현재 스웨덴의 코로나19 대응책을 총괄 지휘하는 안데르스 테그넬 박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곤란하게 만드는 존재는 영국의 BBC 등 해외 언론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스웨덴 국민들의 국뽕이 작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스웨덴의 아름다운 국가 이미지에 흠집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봉쇄 없는 관대한 정책 덕분에 역병이 창궐해도 여전히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을 스웨덴 국민이어서 갖는 특권이라 여기고 있다. 지금까지 모든 면에서 세계에 모범을 보여온 스웨덴이 이번에도 코로나19 대응책에서 새로운 ‘미래모델’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흐뭇해하는 사람도 많다. 사망자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코로나19 대응책 자체가 아니라, 구조적 또는 사회적 결함 탓이라 본다.

지난 3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코로나19와의 전쟁 선포”를 선언했을 때, 이를 어이없어하던 스웨덴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정도의 바이러스로 사람들의 자유까지 제한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주장이었다. 죽음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북유럽 사람 특유의 철학적 견해도 피력했다. 실제로 내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심지어 공공보건청까지도. 그렇지 않고서야, 코로나19 감염자에게도 병원 문턱이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높을 리가 없다.

자, 이제 이 많은 사망자 수 앞에서 안데르스 테그넬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그가 브리핑이나 인터뷰 도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어느 대응책이 옳은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이다. “아직 아무도 모른다”면, 비판의 목소리도 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모른다”면서도 드러나는 그의 자신감 있는 태도가 스웨덴 사람들에겐 국뽕의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모르지만 나는 이제 불편하다. 비판의 목소리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간도 이젠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설령 스웨덴의 코로나19 대응책이 실패로 판명 나더라도, 어떤 개인을 탓할 수는 없다. 누구나 잘못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시스템만 작동하면 되는데, 스웨덴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까지 그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기회가 없었다. 그동안 큰 위기나 과오가 없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기저질환이 있거나 노령이어서 감염될까 무척 두려운 사람들에게 “코로나19와 맞붙어 싸워서 항체를 얻으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지난밤’ 스웨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일 밤’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스웨덴 대사관 앞에 ‘진짜꽃’을 가져와 ‘진짜묵념’을 하고 도로에서 거리행진을 하는 그런 일 말이다.

▶필자 나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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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스웨덴에서 일자리를 찾은 남편 따라 아들 셋을 데리고 남부 도시 말뫼에 왔다. 처음엔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뭘 하며 사나 했는데, 지금은 제법 바쁜 사람으로 통한다. 스웨덴을 한국에 소개하는 두 권의 책 <스웨덴, 삐삐와 닐스의 나라를 걷다>와 <스웨덴 일기>를 썼고, 곧 비빔밥 파는 도시락 가게를 열어 스웨덴 사람들에게 한국의 맛을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