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쓰레기통 속 인류의 앞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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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산티아고 거리에 퓨마, 미국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앞 코요테, 이스라엘 텔아비브 도심에는 자칼 떼….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나온 외신 사진들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지구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산업활동 제약 덕에 대기도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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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역 산업부 기자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지구상에 인구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약 300만년 전 살았다는 인류 조상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후손들이 77억명이나 지구를 뒤덮었다. 남극, 북극, 적도, 사막, 밀림, 고산지대 가릴 것 없이 점령한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위대한 인류”라고 자화자찬해야 할까. 그 대가는 신종 바이러스의 잇단 출현이다. 온난화로 시베리아 동토가 녹으면 잠자던 고대 바이러스까지 나올 것이라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자본주의는 결국 태생적 특성인 과잉생산·과소소비 때문에 파국을 맞을 것이라들 했다. 그러나 지금 21세기 자본주의는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마구 찍어내고 대충 쓰다 버린다. 지구엔 생채기가 났다.

잡식동물 인간은 과도한 육식을 즐긴다. 주위에도 1주일에 며칠씩 고기를 굽는 이들이 있다. 이미 기름진 배에 고기를 더 대느라 아마존 등지의 나무는 베어져 사료용 초지나 목장으로 전락한다. 축산분뇨 등으로 온실가스 배출은 더 늘었다. 본능 탓에 육식을 금할 수 없다면 이제 대체육이나 인공육 같은 신기술 발전이 절실하다. 이미 인공육은 서구에선 화두로 떠올랐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는 비교우위론으로 국제교역의 이점을 설파했다. 그러나 이런 교역이 자연을 파괴하고 과잉 분업체제를 양산한 게 아닌가 싶다. 이제는 좀 비효율적이더라도 지역에서 최대한 자체 조달하는 방식을 고민해볼 때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같은 지나친 보호주의는 경계해야겠지만, 해외진출 기업의 국내 복귀를 뜻하는 ‘리쇼어링’은 배울 점들이 있다. 인공지능(AI)이 발전하면 해외 저임금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 것이다. 게다가 우리에겐 철책 너머 북녘에 기회의 장이 열릴 수 있다.

기존 질서가 해체, 재정립되는 세상이 다가온다. 더 줄이고 흩어져야 한다. 흑사병으로 불린 페스트가 유럽을 강타한 17세기. 어떤 지역은 인구의 4분의 3까지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그 여파는 중세질서의 붕괴로 르네상스를 불렀다.

우리에게 친숙한 아이작 뉴턴(1642~1727)의 ‘만유인력 법칙의 사과’도 페스트 아래 등장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다니던 뉴턴은 1665~1666년 고향인 잉글랜드 링컨셔주 울즈소프에 내려가야 했다. 페스트로 학교가 문을 닫아서다. 물리학, 수학, 천문학 등에서 그의 주요 발견이 고향에 머물 때 나왔단다. 요즘 같았으면 온라인 강의를 받느라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테다. 21세기 인류에게도 ‘정신적 낙향’이 필요해 보인다. 한 발자국 물러선 가운데 더 나은 내일을 향한 아이디어가 싹틀 것이다.

요즘 세간에는 이런 말들이 나돈다. ‘거주불능 지구’ ‘최후의 인류’ ‘22세기는 없다’ 등이다. 인류의 미래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집 앞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