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21세기 가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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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켜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게 한다. 우리 속에 잠자던 동물적 감각이 깨어나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가치법을 집행한다. 평소 하찮게 여기던 값싼 것들의 가치가 급상승하고 부러워했던 고가의 명품들이 하찮게 보이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시장에서 매겨지는 가격이 아닌 다른 가치가 우리 삶의 나침반이 되어 있는 아주 특수해 보이는 경험을 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특수하고 무엇이 보편적인가? 특수하다고 느끼는 이 가치법이 수십억년의 지구 역사를 관철해온 정상이고 지구 생태계와 진화의 균제상태였을 것이다. 고작 200년 남짓 짧은 자본주의의 일장춘몽 속에서 잠시 잊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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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분배정의연구센터장

코로나19 사태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평소에 돈 주고 샀던 음식, 물건, 여가를 집에서 자가 공급한다. 이런 자가 공급이 대체하는 경제활동이 성장률 감소와 실업과 같은 경제위기의 현상일진대, 모든 사람이 건강하게 생활하기에 문제없을 식량과 주거만 보장된다면 자가 생산이 창출하는 가치가 그것이 대체하는 경제활동의 가치보다 작다고만 할 수도 없다. 시장에서는 살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가족, 친지, 이웃들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제발전의 척도로 사용하는 국내총생산, GDP란 지표에서 이런 자가 생산의 가치는 빠진다. 이뿐만 아니라 시장이 평가하지 않거나 평가할 수 없는 수많은 가치들도 빠진다. 고된 노동과 절망 속에 갇힌 사람들의 삶과 인간 존엄의 상실의 가치, 산업재해에 무방비한 노동의 공포와 온갖 부조리와 부당한 차별이 만드는 분노의 가치, 아름다운 자연과 생명의 가치, 깨끗한 물과 공기의 가치, 존경과 신뢰의 가치, 자비와 사랑의 가치, 사회적 연대의 가치, 이 모든 가치들을 빠뜨리고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정하는 가격에 따르는 가치법이 국가발전과 인간진보를 가늠하는 기준이 됐다.

재난은 이런 가치법의 맹점을 들춰낸다. 많은 선진국들이 이룩한 인간진보가 비틀거리는 것을 보면서 이 가치법에 심각한 오류를 발견한다. 방역 현장에서 땀 흘리며 봉사하는 의료진의 헌신, 착한 소비의 확산, 자발적인 방역과 물리적 거리 두기를 몸소 실천하는 시민의식을 포함하여 시장가격이 빠뜨린 다른 모든 가치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자가 생산되거나 사회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가치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이 세상의 누구라도 굶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약간의 먹을 것, 조그만 공간, 최소한의 기초재만 갖추어진다면 스스로 창출할 수 있는 귀중한 가치들이 가지각색으로 널려있다. 이런 가치를 포함해서 경제성장을 측정한다면 성장률을 높이는 좋은 방법은 기본적인 욕구의 결핍을 제거하는 것이다. 단지 이런 분배만으로도 글로벌 경제라는 넓은 마당에서 고가에 팔리는 상품 못지않은 감동을 지역 경제 혹은 가족, 친지, 이웃과의 좁은 마당에서 생산할 수 있다. 이처럼 기초적 필요와 그 결핍의 해소를 우선시하는 것은 맹자, 율곡, 다산, 그리고 현대의 존 롤스, 아마르티아 센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정의의 원칙들과도 일맥상통한다.

지난 반세기,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룬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인들의 자가 공급의 영역이 시장으로 교체된 것은 물론 자유방임과 효율성이란 미명하에 공공부문이 민간부문으로 대체되고 지구 곳곳 공유자산과 자연의 영역들이 사유화되어 글로벌 가치사슬에 강제 편입되어 왔다. 이렇게 비대해진 21세기 자본주의가 GDP 성장을 극대화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회적 가치의 희생 역시 상당하다. 불평등과 양극화의 사회문제가 대두되고 지구환경의 위기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아직도 세계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은 빈곤과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류의 진보를 결정한다고 믿는 지적 자산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자연·인문·사회 기초학문의 발전은 20세기 초반과 그 이전에 훨씬 더 획기적이었다. 순수한 학술적 탐구 정신과 명예가 그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이를 자본의 세속적 이익으로 대체한 21세기, 과학과 인류의 지적 자산은 자본의 성장에 종속되었고 그 진보는 더뎌졌다. 사소한 편리함, 가진 나라와 가진 자들의 탐닉을 위해 거대 자본이 투자되고 사람들은 그 편리함과 탐닉의 유행을 따라 새 물건에 적응하는 훈련을 반복하고 있다. 자유방임은 가진 자들의 통제일 뿐이고 효율성은, 중대한 사회적 가치가 배제된, 잘못된 가치의 극대화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