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바이러스 시대의 사랑법… 키스 전에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기

코로나가 바꿔놓은 사랑 방식… '인스턴트' 대신 '슬로 러브'
싱글들, 구애도 전통방식으로… '키스 먼저'였던 평균율 바꿔
기존 데이트 디테일 모두 달라져, '찐'사랑을 배우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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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5.28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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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 소설가

'사회적 거리는 멀어져도 마음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동네를 걷다가 현수막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저걸 보는 사람 중 몇이나 '아, 그래.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는 나날이구나'라고 생각할까도 싶었고. 그랬는데, 며칠 전에 들은 '슬로 러브'가 떠올랐다. 예전처럼 마음껏 데이트를 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의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미국의 이야기가. 상대가 누군지도 잘 모르고 '접촉'부터 하던 시대에서 상대를 알아가는 시간을 '비접촉'으로 가지게 된 시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마스크를 쓴 나는 역시나 마스크를 쓴 S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사회적 거리를 두고 나란히 광화문을 걸으며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투 핫'에 대해 이야기했다.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중인 연애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키스'와 '섹스' 금지가 조건인 이색 프로다. 키스하거나 섹스하지 않고 진실된 사랑을 찾는 자에게 십만달러 상금을 준다는 이 프로는 이런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당신이 천국에서 이들과 머물면서 섹스를 참아야 한다면 자신 있나요?' 너무 뜨거워서 '투 핫(too hot)'이라는 이 프로의 출연자들은 누구보다 자유로운 관계를 즐기는, 외모 자본이 출중한 이들이다. 나는 영장류 다큐멘터리를 찍는 듯한 시선으로 연출한 이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참이었다. 촌스럽게도 종종 이런 메시지를 강조할 때 출연자들은 야유한다. '인스턴트 사랑의 시대, 진실된 '찐'사랑을 배우길 바라요.'

S에게 들은 이야기를 좀 더 옮겨보겠다. 어쩌면 인생 최초로 사랑에 대해 배우고 있는 시간이라고. 미국의 싱글들이 사랑의 속도를 늦추면서 전통적 구애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이게 꽤 긍정적이라는 거다. 마음이,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아, 여기서의 전통적인 구애 방식이란 이거다. '키스하기 전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 (코로나 이전에 만들어졌을) '투 핫'의 연출자가 출연자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덕목이, 코로나로 하여금 '키스 먼저'였던 대다수의 평균율을 바꿔 놓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의 힘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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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구글에 'virus'와 'slow love'를 넣어 더 찾아보았다. 미국의 싱글들은 이 전통적이고도 낭만적인 구애를 스마트폰 앱으로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코로나 이전에는 6%만이 영상 대화를 했는데 이제는 69%가 영상 대화를 한다는 것. 키스를 해야 하는지, 집으로 초대해야 하는지 같은 코로나 이전에 중요했던 데이트의 세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또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두려움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한다. 두려움과 희망이라니….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하기까지 이르렀는데, 감정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비 오는 날 같이 비에 젖어보는 일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랑이 떠올랐다. 무려 오십 년 넘게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슬로 러브'가. 남자는 여자의 남편이 죽은 날 여자의 인생에 다시 등장한다. 죽은 연적의 장례식장에 슬그머니 와서 이 남자가 하는 일이란 모자란 커피 채우기와 보조 의자 구해오기 같은 표도 나지 않는 뒷설거지다. 그러고는 홀로 된 그녀에게 하는 말. '반세기가 넘게 이런 기회가 오길 기다려왔소.' 남편이 죽은 첫날 이런 이야기를 하면 경멸을 살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남자, 플로렌티노 아리사다.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인물이다. 아주 천천히 사랑하는 이 남자는 콜레라가 창궐하던 시절에 여자를 알게 되어 콜레라가 자취를 감추고 한참이 지나고서도 여자를 사랑한다. 코로나 시대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다시 보니 아주 묘했다. 나는 이 남자 플로렌티노 아리사를 잊을 수 없는데 소설에 나오는 남자 중 일생을 바쳐 사랑에 투신하는 남자는 지극히 희귀하기 때문이다. 젊은 날 '매 맞은 개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는 꽤 괜찮은 노년이 되었고, 글솜씨마저 연마해 시인 같은 필력으로 인생과 사랑, 늙음과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 가득한 편지를 그녀에게 보낸다.

보나 마나 명문일 그 편지를 인용해서 이 글을 끝내면 딱 좋겠는데, 마르케스는 그녀에게 쓴 편지는 소설에 써주지 않았다. 혼자 생각해볼 수밖에 없겠다. 인생과 사랑,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두려움과 희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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