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리포트] 누가 친일파인가

文 대통령의 지난 3년, 잇따른 한일 관계 파괴
일본 우익엔 활로 열어주고 親韓세력은 소멸 위기로 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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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5.28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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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도쿄 특파원

"2차 대전 후 지성적이고 사상적 축적을 해 왔던 일본의 양심 세력들이 분명히 있는데 혹시 이분들의 목소리가 일본 내에서 나올 수 없는 분위기인가."

지난해 10월 주일대사관 국정감사장. 민주당 김부겸 의원의 질문이 국감장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왜 이전과는 달리 일본 진보 세력이 한국을 응원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는 개탄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관표 대사는 당시 부임 5개월을 막 넘기고 있었다. 그가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뼈저리게 느낀 일본 상황이 국회 속기록에 기록돼 있다. "일본 내에서도 양심적인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적지 않게 있다. 간혹 그분들의 목소리가 언론을 통해서 발표되기도 하고 단체적 의사 표시도 하는데 비중으로 봐서는 굉장히 소외된 감이 있어서 상당히 안타깝다." 남 대사는 30년 넘는 공무원 생활 동안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평을 들어왔다. 그런 외교관이 '굉장히' '상당히'라는 수식어를 사용해 친한(親韓) 세력의 상황을 묘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도쿄 한복판에서 나온 여당 중진 의원과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 출신 남 대사 간의 무거운 대화. 이 장면은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일본 내 친한파 인사들이 처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현 정부가 지난 3년간 위안부 합의 파기, 징용 배상 추진, 한일 청구권 협정 무시로 한일 관계를 부숴온 결과는 참담하다. 일본 내 혐한(嫌韓) 우익의 활로를 활짝 열어주고, 친한파는 남 대사의 표현대로 '굉장히' 소외돼버렸다.

1965년 수교 후 한일 역사 문제는 한국의 시민 단체 홀로 뛰어서 진전된 것이 아니었다. 동해(東海) 건너편에서 손뼉을 맞춰온 이들이 일본 정치의 중심지 나카타초(永田町)를 움직여서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모태가 된 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도 일조했다. 사할린 잔류 한국인이 귀국하는 데도 오누마 야스아키(大沼保昭) 도쿄대 명예교수 등의 공헌이 컸다. 그랬던 이들이 현 정부 들어서 일본 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은 물론 따가운 시선을 받는 처지가 돼 버렸다.

한일 역사 문제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다. 여기에 깊숙이 관여했던 일본인 관계자는 현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 사회는 그동안 식민 지배라는 원죄 때문에 한국의 무리한 요구도 수용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달라졌다. 기존의 일한 합의를 모두 뒤집어엎으려고 해 우익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젠 나 같은 사람이 한국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졌다."

문재인 정부의 후원으로 그간 '무한 권력'이 돼 질주해 온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씨에게 실망한 친한 인사들도 적지 않다. 그중 한 명은 윤씨 사건이 터진 후, "문재인 정권 들어서 마치 벼슬을 단 것처럼 행동하던 이들의 위선을 자주 봐 와서 별로 놀랍지 않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 대통령에 대한 일본 내 친한 세력의 실망감은 표면화하고 있다. 한일 관계를 중시하는 마이니치신문·아사히신문이 문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것은 이제 뉴스도 안 될 정도다. 위안부 문제 해결 등을 위해 노력해 온 공로로 만해평화대상을 받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도 화가 나 있다. 그는 "문 대통령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주장하면서 정작 위안부 피해자 4분의 3이 일본 정부가 보낸 위로금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순" 이라고 비판한다.

여당과 친문(親文) 세력이 자주 활용하는 '친일파'는 오래전에 유효기간이 끝난 개념이다. 그럼에도 "친일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지난 3년간 일본 사회의 친한 세력을 위축시키고 혐한 세력의 힘을 키워준 문 대통령과 그 주변 세력을 친일파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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