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착한' 은행 바라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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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5.28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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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훈 경제부 기자

코로나 사태 이후 은행권의 노력을 보면 눈물겹다. 화훼 농가를 돕겠다며 꽃을 사들이고, 금융사 임원들은 앞다퉈 긴급재난지원금을 기부했다. '착한 임대인 운동' '착한 선결제 운동' 등 온갖 '착한' 운동에 앞장선다. 중소기업·소상공인에게는 천문학적인 돈을 풀고 대출 상환을 유예해줬다. 이런 모습만 보면 영리를 좇는 민간 회사가 아니라 거의 공공기관 같다. 이렇게 국민에게 사랑받으려고 애쓰는 업계가 또 있을까 싶다. 이런 게 진짜 은행의 얼굴일까. 밖으로 잘 보여주지 않으려는 다른 얼굴도 있다.

작년부터 많은 국민이 은행의 부끄러운 '민낯'을 봤다.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라임자산운용 펀드 사태, 디스커버리자산운용 펀드 사태 등이 하루가 멀다고 터졌다. 은행은 고위험 금융 상품을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소비자에게 팔아치웠다. 원금을 날린 사례가 허다했다. '은행은 안전하다' '믿을 수 있다'는 신뢰가 무너졌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나도 모르게 내 돈이 부실 펀드에 들어갔다" "원금이 사실상 보전된다는 달콤한 말에 속았다"고 하소연했다. 요양원에 입원한 할머니에게 고위험 금융상품인 DLF는 물론 평생 쓸 일이 없을 주택청약통장을 팔아치운 은행도 있었다. 펀드에 사고가 터져 투자자가 분통을 터뜨리면 '우리도 몰랐다'며 쏙 빠져나가기 일쑤다. 하다못해 동네 구멍가게도 자기가 판 물건이 불량품일 때 '제조회사에 따지라'고 하면 욕먹는다. 그래서 은행 PB가 고객 자산 관리 서비스인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이 아닌, 해적 뱅킹(Pirate Banking)의 약자라는 조롱까지 나오는 것이다. 남의 물건을 마구잡이로 약탈하는 해적처럼 금융 상식이 부족한 은퇴·고령 투자자 등 약자들의 지갑을 노렸기 때문이다.

은행은 남의 돈으로 사업하는 회사다. 은행 자산에서 자기 돈(자기자본)은 15% 안팎에 그친다. 나머지 85% 정도는 고객에게서 꿔온 돈이다. 고객이 '믿고' 맡긴 돈으로, 은행은 이 자금을 밑천 삼아 장사해 돈을 번다. 은행권에서 신뢰가 특히 중요한 이유다.

가뜩이나 '은행의 위기'가 거론되는 시대다. 아마존 같은 빅테크(Big Tech) 기업이 금융 영역을 넘보고 있다. 전통적인 은행업이 낡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러나 우리나라 은행의 경우, 가장 큰 위기의 씨앗은 은행 내부에 있다. 신뢰라는 무엇보다 중요한 자산이 붕괴하고 있다. 은행이 선심 쓰듯 '착한' 운동에 동참하지만, 실은 고객을 속여가며 번 돈을 쓰는 거라면 누구도 반기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큰 사회 공헌은 고객 신뢰를 배반하지 않는 데 있지 않을까. 고객이 바라는 건 '착한 은행'이 아니다. 믿을 수 있는 '정직한 은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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