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안 할래요,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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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5.28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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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나는 갖고 싶고, 써보고 싶은 물건이 많은 물욕의 화신이다. 디자인 잡지 편집장이라는 직업상 좋은 디자인을 많이 보고 다니고 그 결과 욕망의 부추김을 당하는 일도 잦다. 기꺼이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물욕이 점점 약해져 간다. 정확하게는 소유욕이 경험에 대한 추구로 상당 부분 전환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많은 물건을 사는 게 풍요로운 삶이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겐 어떤 상품과 서비스가 필요할까? 물건이 없어 만들어내던 시대를 지나 모든 게 흥청망청 넘쳐나는 시대에 '필요한' 물건들은 어떤 가치와 매력이 있어야 할까? "더 나은 제품을 선택함으로써 더 적게 소비하고 더 오래 소유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한다"고 한 에릭 옐스마(디트로이트 데님 컴퍼니 대표)의 말은 이 물음에 힌트를 준다.

이제 무엇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것보다 디자인하지 않는 것이 더 고도의 테크닉이 되었다.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얘기다.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를 자처하는 이들도 등장했다. '롱라이프(long life·오래가는) 디자인'을 발견하고 널리 알리는 나가오카 겐메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본래 좋은 제품이지만 홍수처럼 쏟아지는 신상품에 묻힌 것을 먼지만 털어 다시 소비자들의 주목을 받도록 돕는 일을 한다. 즉 새로운 물건을 디자인하기보다는 시간이 증명한 좋은 물건, 롱라이프 디자인을 선별하는 역할이다.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역할에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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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 마케팅의 협력자, 제품의 부가가치를 올리는 기술처럼 이해되던 때도 있었다. "디자인은 문제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해결해야 하는데, 요즘엔 문제를 만드는 디자인이 많다"고 한 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말도 쉽게 흘려 버리기 어렵다. 뭐든지 과잉인 시대에는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이 더 많아져야 할 것 같다. 이건 단지 디자인에 관한 얘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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