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수 할머니 기자회견으로 한가지는 확실해졌다
[정의연 사태, 난 이렇게 본다] 위안부, 위안부 운동 그리고 정대협
by 김종성(qqqkim2000)정의기억연대와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는 이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생산적 논의의 장을 열고자 합니다. 다양한 글을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25일 두번째 기자회견으로 확실해진 한 가지가 있다. 이용수 할머니 역시 위안부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위안부 피해자와 위안부 운동을 분열시키려는 세력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최근 의혹이 제기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윤미향 정의연 전 이사장과 관련된 의혹과 더불어 정의연의 회계 투명성을 해결하는 쪽으로 향후 상황이 전개될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부분이 있다. 이번 사안이 위안부 운동의 운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며, 윤미향 전 이사장과 정의연의 문제가 위안부 운동의 문제와 등치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이번 사건으로 위안부 운동이 어느 정도 상처는 받을 수 있겠지만, 이번 사건을 위안부 운동 자체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윤미향과 정의연만으로는 지난 30여 년 간의 성과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 지 45년이나 흐른 1990년대에 위안부 운동이 뒤늦게 본격화된 것은 크게 볼 때 세 가지 요소 때문이었다. 첫째, 45년 세월의 비바람에도 씻기기 힘들 정도로 일본의 죄악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피해자들이 '복수심'을 잃지 않고 용기 있게 나섰기 때문이다. 1990년대만 해도 위안부 피해자는 피해자가 아니라 도리어 죄인이 될 수도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는 민족문제의 피해자인 동시에 성차별 문제의 피해자다. 때에 따라서는 일본뿐 아니라 동족 남성들로부터도 비난을 들을 수 있었다. 설령 피해자로 인정된다 해도, 도리어 숨죽여 지내야 할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들은 서민 계층인 동시에 식민지 주민이자 여성이었다. 그들이 당한 고난은 민중에 대한 수탈 문제, 식민지에 대한 착취 문제, 여성에 대한 차별 문제와 연관되었다. 그래서 위안부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것은 여느 폭로에 비해 복잡하고 부담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 아니 민족의 피해 사실, 더 나아가 여성으로서의 피해 사실을 용감하게 폭로했다. 일본 정부가 관련 문서들을 독점하고 있어 물증을 많이 찾아내기 곤란한 상항에서 그들의 폭로는 산 증거인 동시에 사료(史料)가 될 수밖에 없었다.
비난과 조롱을 각오하고 역사의 산증인으로 나선 그들이 있었기에 1990년대부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중죄를 지었고 피해자들이 용기를 낸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막는 힘이 거대했기 때문에 1990년대 이전에는 공론화가 쉽지 않았다.
일본의 가장 추악한 치부
위안부 문제는 독도나 역사 교과서 문제와 성격을 다소 달리한다. 독도나 교과서 문제에 일본의 사악함이 드러난다면, 위안부 문제에서는 사악함에 더해 추악함까지 드러난다. 1990년대 이래로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도모해온 일본이 여태까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위안부 문제로 인한 이미지 추락이 일본의 발목을 잡는 측면이 있다. 이렇듯 이 문제는 다른 사안에 비해 일본에 치명적이다. 독도나 교과서 문제보다 이 문제가 오래도록 부각되지 못한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신이 깎이면 일본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일본을 대리인으로 세워 북한과 중국을 압박하고 한국을 굴종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에도 흠집이 생긴다. 그래서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던 1990년대 이전에 이 문제를 대놓고 쟁점화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국민 여론에 떠밀려 이따금 대일 비판에 나서는 한국 정부도 일본의 가장 추악한 치부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한국 정부가 그렇게 하려 해도 미국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위의 두 조건이 충족된다 해도 그 둘만으로는 위안부 문제의 쟁점화가 쉽지 않았다. 공론화되기 힘들었던 위안부 문제가 세상을 이처럼 들썩일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글로벌 차원의 지각변동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이 퇴조하고 이로 인해 친미 정권들이 약해지면서 필리핀(1986년)과 한국(1987년) 등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동유럽에서 공산권이 쇠약해지고 이 틈을 타서 독일이 전격적인 통일을 이룬 대격변이 위안부 문제 제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위안부 피해자 및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시민들이 미국과 한국 정부 눈치를 덜 보며 문제 제기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 같은 3대 요소에 힘입어 위안부 문제가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었다. 지상에 새겨진 일본의 죄악이 너무도 강렬했다는 점(地), 피해자들이 한을 간직하고 용기 있게 나섰다는 점(人), 위안부 문제 해결의 장애물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세계질서가 요동쳤다는 점(天)이 위안부 문제의 돌파구가 됐다. 천지인(天地人) 삼합의 작용이 문제 해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에너지
3대 요소가 갖춰진 1990년대 초반부터 위안부 운동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피해자와 운동단체의 결합이 이 시기에 이뤄졌다. 1990년 11월 16일 한국 시민단체들이 정의기억연대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결성하고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정대협과 공조해 1991년 8월 14일의 역사적인 기자회견을 여는 일이 그런 결합의 결과로 나타났다.
위안부 피해자는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와 다르다. 후자는 공장 같은 노동 현장으로 강제동원됐다. 양자는 다르지만, 이 시기 한국에서는 그런 차이가 명확하지 않았다. 정대협 결성 2년 전인 1988년 5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 설치된 조직도 '정신대문제 연구위원회'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다. 위안부와 정신대가 서로 다른데도 정대협이란 명칭을 오랫동안 사용한 것은, 명칭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정대협이 갖는 상징성을 쉽게 놓아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명칭 문제는 한국 위안부 운동의 성과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주로 지식인들에 의해 전개된 초기의 위안부 운동 때도 위안부와 정신대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 문제에 관한 자료를 구하는 일이 한국에서 그만큼 어려웠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처럼 불모지나 다름없던 환경 속에서 위안부 운동을 시작해 지금의 성과를 이뤘으니, 위안부 피해자들과 운동단체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겠는지를 느낄 수 있다.
삼합(三合)의 작용과 피해자 및 운동단체의 결합 하에, 위안부 운동은 피해자 개인의 한을 푸는 차원을 넘어 훨씬 고차원의 방향을 지향했다. 동일 범죄의 재발을 막는 방향으로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재발을 막는 방법의 하나는 어느 정치권력도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못 하도록 쐐기를 박아두는 것이다. 그간 위안부 운동은 일본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정부에도 호소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이는 운동 참여자들의 목적이 단순히 사과와 배상을 받는 데만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지난 30여 년의 운동은 약한 나라의 약한 계층에 속한 여성들이 더는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충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1993년 일본이 고노 담화를 통해 위안부 문제의 존재 사실을 인정하고 2007년 미국 하원이 일본을 규탄하는 위안부 결의안을 내고 2011년 한국 헌법재판소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부작위(의무 불이행)를 위헌으로 판시한 것은, 또 미국과 유럽의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들이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동의한 것은 위안부 운동이 세계를 움직이고 정치 권력을 견제하는 방향을 견지해왔음을 보여준다. 피해자와 운동단체들이 승화된 마음을 갖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 위안부 피해자와 정대협의 공조가 시작된 뒤인 1992년 1월 8일부터 정대협의 수요집회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열렸다. 이 집회가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세계인의 관심과 호응을 받는 것은, 위안부 운동이 각국 정치 권력뿐 아니라 전 세계 대중을 움직이는 데도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 운동이 여성만을 위한 운동도 아니고 한민족만을 위한 운동도 아님을 증명한다. 모든 인류의 인권과 관련된 일이기에 그런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운동이 세계를 움직이고 역사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내재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초국가적인 연대
위안부 운동이 한국인 피해자와 한국인 시민운동가들의 힘만으로, 또 한국 국민들의 응원만으로 성과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정대협 출범 시점보다 약간 늦은 1992년 8월 북한에서는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또 정대협 출범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 1990년 12월에는 '일본의 전후책임을 확실히 하는 모임', 1991년 1월에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 5월에는 '조선인 종군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 9월에는 '그룹, 성과 천황을 생각하는 모임', 11월에는 '종군 위안부문제 우리 여성 네트워크' 등이 출범했다. 이 외에도 많은 단체가 일본에서 등장했다.
1993년 고노 담화를 비롯한 일련의 성과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남북한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민간단체들이 초국가적인 연대를 통해 일본 정부의 죄악을 성토하고 문제 해결을 촉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 각국으로 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한국 교포들뿐 아니라 현지 국민과 정치인들의 응원도 큰 힘이 됐다. 한마디로 위안부 운동은 온 세계가 다 같이 힘을 보탠 운동이다.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와 운동단체가 첫 삽을 뜬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만의 힘으로 이뤄진 운동은 결코 아니다. 여성에 대한 착취가 더는 벌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전 세계 인류의 각성과 공동행동이 일궈낸 성과다.
지금 한·일 양국 극우세력은 이용수 할머니와 운동단체들을 갈라놓고 위안부 운동을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가 성취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의연의 회계 문제가 비판받고 책임자가 처벌받는다 해도, 이번 일이 위안부 운동에 타격을 주기는 쉽지 않다. 이미 세계적인 운동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세계 민중과, 세계 약소 민족과, 세계 여성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대세가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빌미로 위안부 운동을 약화시키려고 애쓰는 세력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용수 할머니 역시 위안부 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키기 위해서 문제 제기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사태를 지나면 위안부 운동도 새로운 상황에 맞게 변모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확대를 계기로 대중이 국가권력뿐 아니라 시민운동에 대해서도 감시와 개입을 확대해가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번 사건은 그런 경향에 발맞춰 위안부 운동도 대중과 좀 더 호흡하고 좀 더 보여주는 방법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하고 있다.
민간 중심의 위안부 운동은 이번 일을 계기로 어느 정도 숨 고르기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위안부 운동은 중단 없이 전개돼야 하므로 적어도 당분간은 한국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위안부 문제를 방치하는 국가의 부작위는 위헌이라고 헌재가 결정했듯, 한국 정부도 이번 일을 계기로 이 운동에 보다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는 방향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비록 돈 문제로 불거지기는 했지만, 이번 사건은 위안부 운동의 재도약을 위한 고민과 노력의 필요성을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