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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부자들 상담소] 어떻게 될지 몰라요 / 허규형

뇌부자들

상담소

허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힘든 마음을 표현하면 친구들이 싫어하지 않을까요?”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ㅅ씨 역시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혼자서 고민을 안고 속앓이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모른다’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상담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잠시 숨을 고르길 기다린 후 ‘왜 그런 갈등을 겪고 있는지’를 물어보니 이전 경험 때문이라고 했다. 부모님은 정말 어렵게 꺼낸, 힘들다는 하소연을 받아주지 않으셨다. “너만 힘든 것이 아니야, 네가 살 만하니까 그런 시답지 않은 문제를 고민이라며 힘들어하는구나.” 한심하다는 듯 말을 자르는 부모님의 반응에 더 이상 고민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ㅅ씨는 가족도 받아주지 않는 상처를 어떻게 친구가 받아주겠냐며 의기소침했다. 그가 처한 우울한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런 유의 걱정은 추측이며 어림짐작일 뿐이다. 추측은 미루어 생각하며 헤아리는 것이다. 누구나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어림짐작으로 헤아려 결론을 내리는 우를 흔히 범한다. 어리석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걱정과 추측에 매여 전전긍긍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패하고 싶지 않고, 거절당하기 싫으며, 아픔을 겪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당연히 아픔이 따른다. 부러지거나 찢겨 얻은 신체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처를 뇌는 통증으로 인식한다. 부정적인 추측과 짐작을 통해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걱정이 커지면 결국 친구나 부모님께 힘든 일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추측이 낳은 안타까운 단정이다.

“힘든 이야기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아요. 꼭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당연히 자신의 속마음을 꼭 밝힐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지금 고민을 가지고 있으며, 그 고민을 털어놓는 것에 대한 복잡한 갈등을 상담한다는 것은 힘든 마음을 친구에게 털어놓고 싶고 자신의 고민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는 방증이다. 마음을 열어 보이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다면 상대의 반응에 대해 고민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힘든 이야기를 하지 않고 참는다면 지적이나 질책을 감당할 일도 없고 상대방을 힘들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당장은 입을 닫고 있는 편이 더 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을 나누는 사람에게조차 하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하는 괴로움과 함께 소심하고 위축된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인해 장기적으로는 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야 할까. ‘어떻게’가 가장 중요하다. 먼저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우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친구에게 자신이 문제를 안고 있음을 설명하고, 힘든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괜찮을지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친구가 선선히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이야기를 듣는 도중이라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다면 알려달라고 할 수도 있다. 이야기를 마친 뒤에 친구에게 어땠는지 물어보고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다.

과거의 불편했던 경험 또한 객관적이며 이성적으로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부모님이 과거에 내가 힘들어했던 상황을 받아주지 않았던 이유를 되짚어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안정된다. 부모님이 성격이 강해서 자식 걱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이실 수도 있다. 또는 부모님께 기대어 울고 싶었을 그때, 부모님 역시 한 치도 열어둘 마음의 여유가 없던 상태였던 것은 아닐까. 내가 고민했던 내용이 공교롭게도 부모님의 트라우마를 건드려 자식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프고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이성적으로 접근해보면 분명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부모님께는 이야기 안 하는 게 좋겠다는 결과가 나와도 괜찮다.

어떻게 할지 구체화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이 줄어든다. 불안, 공포 같은 감정에 휩싸이는 것을 인지적으로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단 부정적인 추측이 머릿속에 떠올라 행동을 멈추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몰라’라고 스스로에게 말해보면 어떨까.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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