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로 분단의 현장을 찾아가다
[목판화로 만나는 김억의 국토 서사 ①] DMZ 이쪽과 저쪽
by 이상기(skrie)<국토 서사>가 뭐지?
김억의 <국토 서사> 전시가 생거진천판화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토 서사>란 우리 국토를 서사적으로 표현함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서사(敍事)는 문학적 표현으로, 사실을 서술적으로 표현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 제목이 The National Territory Narrative다. 그러나 화가이자 판화가인 김억에게 서사는 서술적으로 묘사함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사(敍寫)로 표현함이 옳을 것 같다.
이번 전시회는 2018년부터 3년간 DMZ 지역을 답사하고 목판화로 찍어낸 풍경이 주를 이룬다. 남과 북 사이 화해무드가 만들어져 가능한 일이었다. 주제는 분단의 현장이다. 서쪽 백령도에서 동쪽 금강산까지 한반도의 허리를 따라가고 있다. 길이가 3m가 넘는 대작도 있다. 생거진천판화미술관의 공간은 셋으로 나눠져 있다. 그 중 가장 안쪽 공간에 분단의 서사가 걸려 있다.
또 하나의 주제는 나무다. 소나무, 은행나무가 주를 이룬다. 이들 나무가 전통가옥과 만들어내는 풍경을 서사적으로 묘사했다. 예천 초간정 소나무,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가 대표적이다. 소나무는 송림으로 표현되고, 은행나무는 노거수(老巨樹)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판화로 찍어낸 초간정과 영국사가 실제보다 훨씬 멋있다. 그것은 예술이 생략과 과장을 통해 자연을 이상화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주제는 남도풍색(南道風色)이다. 한반도 남쪽의 모습을 목판화로 찍어냈다. 김억의 남도는 처음에는 전라도를 의미했다. 그 중에서도 전라남도의 해남, 강진, 영암, 진도, 화순, 장성의 명소를 목판으로 재현해 냈다. 그러다가 지역이 넓어지고 주제도 확대되었다. 제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로 영역이 확장된다. 현대화 속에서도 그 모습을 간직하려고 노력하는 산하의 모습을 그려냈다. 김억 작가는 자연의 모습이 변화되어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서부전선 분단의 현장을 답사하다
김억 작가는 전국을 다니다 보니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게 되었고, 내친 김에 DMZ를 따라 동부전선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김억의 판화는 3단계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가장 먼저 현장을 답사한다. 강화도 북단에 가서 예성강과 북녘 산하를 살펴본다. 오두산 전망대에 가서 한강과 임진강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관찰한다. 강화만을 표현하기 위해 김억은 김포 문수산과 문수산성으로 달려간다.
이렇게 해서 DMZ 서부전선 지역의 스케치가 만들어진다. 스케치 다음 단계가 밑그림이다. 이들 그림에서는 산하와 인간의 역사가 표현된다. 강줄기가 혈액이 되고, 산줄기가 살이 되며, 산하 속에 표현된 구조물이 정신이 된다. 이들 세 가지 대상을 통해 시대를 재현하고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마지막 단계가 판각을 하고 찍는 일이다. 판화라는 용어를 생각하면 이 일이 가장 중요할 것 같지만, 예술적인 면에서 보면 판각은 기계적인 측면이 있다.
김억 작가의 경우 답사, 스케치와 밑그림, 판각과 인화에 비슷한 공력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 만큼 그는 현장을 중시한다는 얘기다. 그 때문에 그의 판화를 보면 현장이 한 눈에 들어오고,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강화만'이라는 작품에는 강화도의 역사가 들어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어우르다'에는 개성공단과 송악산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한강과 임진강에는 갈매기 떼가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들 외에 서부전선 가장 서쪽 그리고 가장 북쪽에 있는 백령도를 표현한 작품이 있다. 2014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제목이 '백령도 두무진'이다. 김억은 이곳이 분단 현장임을 알리기 위해 군함과 초소를 표현했다. 그렇지만 어선과 낚시꾼, 관광객을 표현해 긴장과 평화의 공존을 알리고 있다. 바닷가 바위 위에는 물범과 가마우지가 쉬고 있다. 원경으로는 북녘땅 장단반도가 동서로 길게 그려져 있다.
중부전선 분쟁지역을 찾다
중부전선에서는 철원지역 분단현장을 판화로 표현했다. 철원 백마고지, 화살머리 고지, 역곡천이 그 대상이다. '철원 백마고지'는 6․25사변 때 격전지로 유명하다. 전경에 백마고지 전망대가 있고, 중경에 넓은 들판, 철책선과 우리 초소가 있다. 원경으로 철책 너머 산악지역과 북녘 초소가 표현되어 있다. 현장을 가본 사람이라면 김억 작가의 관찰력에 놀랄 것이다. 사진보다 더 자세하게 현장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 있는 9사단 상징조형물 말, 전적비와 위령비, 상승(常勝)의 종 사이를 관광객들이 오간다. 들판에는 접경지대에 사는 농부들이 농사를 짓고 있다. 철책선에서는 우리 병사들이 근무를 하고 있다. 건너편 북녘땅 산 높은 곳에는 초소라기 보다는 막사로 보이는 큰 건물들이 두 군데 분포하고 있다. 분단의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다. 이 판화를 보면 누구든지 스토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다.
'철원 화살머리 고지'는 2018년 9월 남북 군사분야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화살머리 고지에서 남북간 전술도로가 연결되었고, 6․25전사자 남북 공동 유해발굴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김억 작가는 2019년 이곳을 방문한 후 판화작업을 했다.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철책을 무력화시키는 도로의 연결이다.
DMZ 서쪽이 개성공단 때문에, 동쪽이 금강산 관광 때문에 열렸다면, 이곳 중부전선 지역은 화살머리 고지가 처음 열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억의 판화는 철원 화살머리 고지를 예술로 표현한 최초의 작품이 된다. '철원 화살머리 고지'는 남측지역보다 북측지역이 더 많이 표현되었다. 그것은 북쪽 현장을 남쪽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작가의 의지 때문으로 여겨진다.
양구의 해안분지 펀치볼과 두타연은 중요한 안보관광지다. 그 때문에 철원 백마고지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두타연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이기 때문에 자연경관까지 아름다워 유명관광지가 되었다. '양구 두타연' 판화에서는 분단을 느끼기 어렵다. 남측 두타연 관광지 중심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분단의 상징 철책 너머로 금강산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금강산은 볼 수가 없다. 그것은 두타연 뒤로 산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통일을 바라는 염원을 담다
동부전선을 표현한 판화로는 '고성 통일전망대'와 '금강산을 바라보다'가 있다. 모두 2019년 작품이다. '고성 통일전망대'는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인화해 나란히 걸었다.
동해안 해안선을 표현하기 위해 상하로 길게 그림을 그렸다. 그림 전경에 통일전망대 타워를 표현했다. 중경으로 철책선을 표현했다. 그렇지만 이들 분단의 상징 역시 도로로 연결된다. 원경으로 금강산 해금강을 표현했다. 앞쪽이 삼일포고 뒤쪽이 총석정이다.
'금강산을 바라보다'는 길이가 4m 정도 되는 대작이다. 해금강, 외금강, 내금강을 모두 표현하고 있다. 해금강은 '고성 통일전망대'의 축약본이다. 외금강은 비교적 완만한 형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뒤로 뾰족뾰족한 골산의 형태로 내금강을 표현했다. 외금강 앞으로는 분단의 상징 철책선이 가로지르고 있다. 이 그림은 바라보는 금강산의 모습이어서, 금강산의 내부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그것은 김억 작가가 금강산 내부를 들여다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녘땅에서, 분단의 관점에서 금강산을 파노라마로 표현했다는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정선의 '금강산전도'에는 못 미치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분단의 문제를 다뤘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이 판화를 통해 통일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금강산을 바라보다'는 다른 판화작품과 달리 목판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억의 목판화 전시 는 5월 22일부터 8월 19일까지 생거진천 판화박물관에서 열린다. 입장료는 없다. 엽서와 포스터 그리고 도록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