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산읍수산초등학교, 활주로의 북쪽입니다
[답사] 기록엔 없는 주민들의 4·3이야기(성산읍 수산리)
by 제주다크투어(jejudarktours)
지난 16일 제주다크투어는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있는 4·3 유적지에 다녀왔습니다. 유적지뿐만 아니라 제주 제2공항 개발이 강행되면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의 유적과 자연유산들을 눈에 담을 수 있어서 더욱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이번 답사는 수산리에서 나고 자란 오은주 선생님과 오창현 수산1리 청년회장님이 준비해주셔서 더욱더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분들이 들려주시는 생생한 이야기에 콧등이 시큰하고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습니다. 4·3 때 유독 피해가 큰 마을이었던 수산리는 현재 제2공항 건설 예정지이기도 합니다. 국가폭력과 4·3, 주민 동의 없이 강행되려 하는 제2공항 건설을 함께 떠올리며 수산리를 돌아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수산진성입니다. 지금은 수산초등학교 울타리로 일부 흔적이 남아 있는데요. 무려 600년 전인 세종 21(1439)년에 축조되었다는 기록을 옛 문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가 깊은 만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겠지요. 참혹했던 4·3 당시의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오은주 선생님의 이야기와 제민일보 4·3취재반에서 쓴 <4·3은 말한다 ⑤>(1998)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4·3의 광풍이 가장 극심했던 1948년 11월 6일, 마을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합시킨 후 19살 마을 청년 아무개씨를 거명하며 '이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15살 난 소년이 '우리 형입니다'라고 하니 그 자리에서 소년에게 총을 쐈다고 합니다.
"그때 겨우 살아난 4살 아이가 여기 옆에 사는 할아버지"
여기서부터는 기록에는 없는, 마을에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오은주 선생님이 들은 집안 어른의 증언에 따르면 사실 그 자리에는 숨진 15살 청년 외에 4살 난 어린 동생도 있었습니다. 그 동생도 손을 들고 일어나려던 것을 주위에 있던 마을 어른들이 입을 막고 몸으로 숨겨서 겨우 목숨을 살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살아남은 그분이 인근에 살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4·3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체감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마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면서 보이는 울타리 입구에는 수산진성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안내판에는 수산진성에 대한 역사적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4·3과 관련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수산1리 올뤳ᄆᆞ(ㅁ아래아)르 하로산당에도 다녀왔습니다. 수산본향당으로도 불리는 이 당은 수산1·2리, 고성리, 오조리, 성산리에서 공동으로 모시는 본향당입니다. 예전에는 앞서 나열한 5개 리에 더해 난산리, 신양리, 시흥리까지 총 8개 마을 여성들이 모여 함께 당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지금도 특별한 날이면 당제가 거행된다고 합니다.
답사를 하러 갔던 당시에는 당이 닫혀 있어 내부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곳에도 4·3과 관련한 이야기가 서려 있습니다. 4·3과 한국전쟁 이후 엄혹한 시기에 당한 억울한 일을 하소연할 곳이 없자 마을 여성들이 본향당에 와서 이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집에서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내밀한 상처를 내보일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 바로 이 당이었던 것이지요. 가끔 이러한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심방들이 당국에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합니다.
성산읍 수산1리 복지회관 옆 마당에 있는 수산1리 최융양 경위 청덕비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원래는 마을 입구 수산리 버스 정류소 옆에 있던 것을 몇 년 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수산리지>(1994)에 따르면 이 청덕비는 1949년 초부터 10개월가량 수산1리에 주둔한 경찰 충남중대 제1소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비석에 적힌 이름들로 보아 소대장 최융양 경위를 비롯해 42명이 이곳에 주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부대는 마을 청년들과 함께 인민유격대를 토벌하며 공을 세우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역점을 둬, 주민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감동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은주 선생님은 이들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뿐이지, 마을 사람들이 이들의 수발을 드느라 가축을 잡고 밥을 해주는 등 고초를 겪었다고 했습니다. 오 선생님은 사람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 당시 마을 사람들이 청덕비를 세운 게 아닌가 싶다고 조심스레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에 알려진 칠낭궤에도 다녀왔습니다. '궤'는 제주어로 굴이라는 의미입니다. 칠낭궤는 밭 한가운데 있는 큰 구멍을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용암동굴입니다. 굴의 입구는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지만, 동굴 내부로 들어가면 넓은 공간이 나온다고 합니다. 5m 정도 내려가야 하는 동굴인데 이날은 사다리를 준비하지 못해 안타깝게도 아래로 내려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칠낭궤는 동네 어린이들의 놀이터로도 활용되었을 만큼 마을 주민들에게 친숙한 장소입니다. 지난 4월 말, 이곳은 언론을 뜨겁게 달구며 도민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제주 제2공항 예정지에서 2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이 용암동굴이 있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칠낭궤는 제2공항이 들어서면 사라질 수도 있는 동굴입니다. 답사 내내 함께해주신 오창현 수산1리 청년회장님은 칠낭궤와 인근 밭 일대가 예전부터 천연 저류지 역할을 해왔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국토부의 제2공항 환경영향평가서에는 이 같은 내용이 한 줄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또한 4·3 당시 인근 주민들이 토벌군경과 인민유격대를 피해 숨었던 역사 유적지이기도 합니다. 또 1948년 인민유격대에 비판적이었던 마을 사람이 인민유격대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나중에 이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옵니다.
이외에도 진안할망당, 누루못터, 부부석, 한못, 수산굴 등 마을의 다양한 자연문화유산들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이번에 돌아본 수산리는 4·3 때 성산읍(당시 성산면) 내에서도 유독 피해가 컸던 지역이라고 합니다. 당시 성산파출소와 수산리 사이 직선거리가 3.8km 정도 되는데, 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수산리는 산에서 내려오는 인민유격대를 막는 방어선 역할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제 수산리는 제주 제2공항 강행이라는 또 다른 국가폭력에 직면해 있습니다. 국가의 일방적 결정으로 많은 주민들이 그들의 의지와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어렵게 활력을 되찾은 학교가 항공기 소음으로 문을 닫아야 할지 모릅니다. 이번에 본 풍경 중 일부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제주 4·3을 기억하는 우리가 제2공항 문제에도 함께 연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끝으로 이날 답사 휴식 시간에 오창현 청년회장님이 낭송했던 시를 소개합니다. 오창현님의 자작시입니다.
활주로의 북쪽
- 오창현
나는 오래 된 마을의 심장입니다
아이들의 노래와 웃음소리
골목들로 퍼져나가면
마을에는 봄이 오고
꽃들이 피었습니다
운동장을 둘러싼 나무들과 함께
아이들은 자랐습니다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싱싱한 노래와 웃음소리
교실과 운동장에 차오르면
마을에는 다시
봄이 찾아오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그러게 살아갈 줄 았았습니다
비행기의 소음이
노랫소리를 지우고
웃음소리를 지우고
아이들마저 하나 둘 지워갈 때
마을의 심장은 멈추고
아이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나는 성산읍수산초등학교입니다
활주로의 북쪽입니다
수천 명의 아이들을 길러 낸
오래된 마을의 심장입니다
부디 저와 저희마을을 지켜주세요
정직하게 살아온 마을 사람들
여름에는 보리 베고
가을에는 무 심고
겨울에는 밀감 따며
살아온 것처럼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감귤같이 예쁜 아이들
건강하게 키우고
늙은 부모 모시며
천년을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나는 성산읍
수산초등학교입니다
활주로의 북쪽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주다크투어 홈페이지와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jejudarktours.org/ko/news/답사-기록엔-없는-주민들의-43이야기성산읍-수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