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의 꽃산 꽃글]관악산 어느 돌 틈에 핀 병꽃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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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현상인가. 오래전 궁리에서 펴낸 <세계의 깊이>(김우인 엮음)를 초파일에 즈음하여 빼내들었는데 저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그간 지식이란, 접시에 담긴 콩자반처럼 젓가락으로 집어야 내 것이 되었다. 책 몇 권 읽은 게 전부인 불교에 대한 교양도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불교가 현상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관악산은 여러 골짜기를 거느린 큰 산이다. 오래전 한 골짜기를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전공과의 불화를 톡톡히 겪으며 얼른 벗어났다. 오늘은 사당역에서 시작해서 옆 골짜기를 오른다. 골목이 끝나고 관음사 일주문에 현수막이 있다. “만유는 인연이고 인과는 현상이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무슨 뜻인지 대강 알아먹겠는 글귀이다. 조금 용감하게 무식에 기댄다면 만유는 현상이라 해도 되겠고, 현상이란 말은 곧 공(空)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관악은 돌이 퍽 많은 산이다. 산이 세상을 지그시 누르듯 돌은 산을 압침처럼 눌러 산으로 가능케 한다. 유구한 세월 동안 관악이 여기에서 이 현상을 유지하는 건 돌들의 덕분이다. 내처 오르니 각종 운동기구가 있는 공터에 몇몇이 허리운동을 하고 있다. 국기봉 지나 깔딱고개를 넘는데 돌 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돌 틈에서 척박한 환경을 이기고 있는 건 병꽃나무이다. 봄과 여름의 환절기에 꽃들이 잠깐 쉬고 있는데 저 혼자 피어났다. 잘록한 곡선의 콜라병처럼 열매를 맺기에 저 이름을 얻은 나무다. 바위는 나무가 자라기에는 아주 불리하다. 물 주는 이라곤 뻔한데 어쩌다 내려도 저축할 틈도 없이 빗물은 흘러가 버린다. 그래도 용케 한 줌의 흙에 뿌리를 내리고 꽃까지 피워낸 바위와 병꽃나무의 동거생활이 대단하다.

불교는 현상인가. 귀가하는 동안 책과 절에서 길어올린 저 말이 자꾸 생각나서 <세계의 깊이>를 다시 꺼냈다. 웬걸, 눈을 씻고 뒤적여도 그 말은 없었다. 잘못 본 현상인가. “붓다에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종교라는 관념이 있었을까”라는 뒤표지 문장을 내 식으로 번역한 내 머릿속 생각인 듯했다. 아무튼 관음사의 글, 관악산의 돌, 바위의 꽃과 함께 오늘 하루라는 현상도 이렇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