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재난, 시스템 그리고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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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월이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25주기를 맞는다. 거대한 재난은 수많은 관련자들을 만들어냈다. 생존자·유가족·자원봉사자 등 관련자들의 구술을 채집해 ‘사회적 기억’으로 엮은 책 <1995년 서울, 삼풍>을 읽다가 한 대목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시 강남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던 간호사가 구술로 나눠준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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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그는 참사 당일 경기도 분당에서 야간 근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붕괴 소식을 전해 들었다. 강남성모병원은 삼풍백화점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이다. 간호사는 그 길로 뛰어나가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기사에게 사고 소식을 전하면서 병원으로 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기사는 8명 남짓의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했고, 승객들은 전부 양해해주며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는 한 사람만 실은 채 40분 거리를 내리 달렸고 간호사는 병원에 닿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간호사와 버스기사다. 간호사는 직업정신 그 자체를 보여줬고, 버스기사는 영웅적인 결단을 내렸다. 그들은 아낌없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내 시선이 더 오래 머문 곳은 낯선 사람의 갑작스러운 난입과 뒤이은 곤란한 요청에도 군말 없이 버스에서 내려준 승객들이었다.

다들 어디론가 향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을 사람들이다. 왜 하필 자기가 탄 버스에 올라탄 건지, 급하면 택시를 타야 맞는 것 아닌지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객들은 기꺼이 버스에서 내려주었다. 눈앞의 다급해 보이는 사람과, 그가 살려야 할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이런 마음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한국인의 정일까. 인간의 본성적인 측은지심일까. ‘사회적 연대’ 또는 ‘시민적 덕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들의 조용한 실천에 시선이 머문 것은 아마도 우리가 지금 재난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스템은 간호사를 재빨리 병원으로 데려다줄 수 없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였다. 마찬가지로 방역 시스템이 아무리 완벽하게 작동한들 전염병을 완전히 종식시키지는 못한다. 전염병의 완전한 종식은 시민들 각자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생활방역을 실천할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러지 않으면 코로나19가 끊임없이 되돌아와 사회를 파괴한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요컨대 재난이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시스템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시스템이 아무리 잘 구축돼 있어도, 결국 그것을 의도대로 작동시키는 것은 시민들이다. 시민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선함을 실천할 때 비로소 재난을 넘어설 시스템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에는 종종 손해가 동반된다. 손해를 감수한 실천이기에 아름다운 것이고, 그렇기에 실천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대의민주주의와 구조만능주의는 시민들에게 일종의 알리바이인지도 모르겠다. 한 사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가도록 할 책임은 선출된 정치인들과 녹봉 받는 관료들, 그리고 그들이 구축해야 할 시스템에 있으니, 시민들은 죄를 짓지 않거나 남을 해롭게 하지 않으며 그저 열심히 먹고사는 것으로 모든 책임을 다한 것이라는 알리바이 말이다. ‘구조가 문제인데 왜 내게 손해 보기를 요구하는가. 내게 어떠한 책임도 요구하지 말라. 구조를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재난이 확인시켜줬듯 시민들이 책임과 의무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은 재난이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 이르러 점점 더 잦아지고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레베카 솔닛은 자신의 저작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 이렇게 적었다. “재난은 그 자체로는 끔찍하지만 때로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우리가 소망하는 일을 하고, 우리가 형제자매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는 천국의 문 말이다.” 우리는 지금 이 말의 의미를 실체적으로 경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