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아 칼럼]‘강간 문화’ 간과하는 법관들에게
by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서울고법 형사12부(재판장 윤종구)는 지난 12일 집단 성폭행(특수 준강간) 혐의를 받는 가수 정준영(31)·최종훈(30)씨에게 각각 징역 5년과 징역 2년6월을 선고했다. 정씨 형량은 1심보다 1년 줄었다. 최씨 형량은 ‘반토막’ 났다. 2년6월은 법정 최저형의 절반이다. 재판부는 작량감경(법관 재량으로 형량을 깎아줄 수 있는 제도)을 적용했다. 특수 준강간은 무기징역까지 가능한 중범죄다.
재판부가 형을 깎아준 이유는 “본인 행위 반성”(정씨)과 “피해자와의 합의”(최씨)다. 성범죄 양형기준은 ‘진지한 반성’과 ‘(피해자의) 처벌 불원’을 감경 요소로 두고 있다. ‘합의’는 양형기준에 적시돼 있지 않지만, 대체로 처벌 불원과 같은 의미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서울고법 판결은 문제없는 걸까. 재판부는 두 사람 모두 공소사실을 부인한다고 했다.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반성’부터 하는 일이 가능한가. 잘못도 인정하지 않은 채 이뤄지는 ‘합의’는 무슨 의미인가. 부부싸움 하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내 실수’라거나 ‘선물 사줄 테니 제발 봐달라’는 것과 뭐가 다른가.
재판부는 판결을 선고하며 “선남선녀가 만나 술을 마시다가 성적인 신체 접촉을 할 시 국가형벌권이 어떤 경우 개입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선남선녀란 ‘성품이 착한 남자와 여자’ ‘곱게 단장한 남자와 여자’(표준국어대사전)를 뜻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선남선녀로 칭한 것은 집단 성폭행 범죄를 ‘우발적 사고’로 오도할 우려가 있다. ‘선남선녀’라는 표현이 판결문에 포함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적 주목을 받는 사건의 선고공판에서 재판부가 한 발언은 법원의 인식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실종 여성 2명을 살해한 혐의로 최근 신상이 공개된 최신종(31)은 2012년에도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전력이 있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판결문을 보면, 최신종은 피해자를 감금하고 협박한 뒤 목을 조르고 성폭행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피고인이 반성하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신상정보 공개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당시 실형이 선고됐다면, 최소한 신상정보라도 공개됐다면 8년 후 또 다른 여성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19년 선고된 성범죄 관련 1·2심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를 지난 2월 공개했다. 137건 중 48건(35%)이 ‘반성’과 ‘뉘우침’을 감경 요소로 삼았다. 반성의 근거로 제시된 자료는 피고인의 반성문이나 일방적 기부 등이었다. 포털사이트에서 ‘성범죄 반성문’을 검색하면 대필업체 광고가 줄줄이 뜨는 걸 법원만 모르는 모양이다.
‘합의’도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경향신문이 ‘성범죄법 잔혹사’ 시리즈에서 전한 성폭력 피해자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수사받은 경험이 있는 피해자 15명 중 6명, 재판 경험이 있는 피해자 19명 중 9명이 가해자 측으로부터 합의를 종용받은 경험이 있었다. 합의를 종용받는 것만으로도 압박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피고인이 합의를 제안하고는, 경제상황이 어려운 피해자가 합의금을 요구하면 ‘꽃뱀’이라며 역공한다는 것이다.
반성문이나 합의서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형을 깎아주는 관행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법원은 어떤 행위가 ‘진지한 반성’에 해당하는지 양형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합의 또한 마찬가지다. 개별 사건 재판부는 합의가 이뤄진 구체적 맥락과 경위를 검토해야 한다. 설령 합의에 진정성이 있었다 해도 과도한 감경은 옳지 않다. 형사재판은 국가형벌권 행사의 과정이다. 당사자 간 합의보다, 재발방지 가능성이나 처벌수위가 공동체에 미칠 영향을 우선해야 한다.
남성 법관인 정욱도 대구지법 부장판사가 최근 <‘강간 문화’를 간과하는 나의 법관 동료들에게>라는 글을 시사IN에 기고했다. 그는 “법관은 범죄의 충격을 피해자 시각에서 느껴봐야 한다. 일반 범죄의 경우, 거의 모든 법관들은 그리하고 있다”며 “그러나 유독 성범죄 사건에선, 영상·문자·사담으로 익숙해진 공격·지배·착취의 만연 때문에 남성 법관들이 실제 범죄의 비정상성을 과소평가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내면화된 정상성의 기준을 자기성찰을 통해 검증하고 재설정해야 한다. n번방 사건을 키운 사법부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비판을 비이성적·감정적 반응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여성을 포함한 모든 법관들이 새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