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多選 의원으로 살아남는 비법을 알려줄 테니"
초선 당선자에게 걸려온 중진 전화 '공동체보다 내 이익 우선' 여전
선거 패배에도 착란적 탐욕 팽배… 대의의 싹 터야 국민 돌아볼 것
by 조선일보 최승현 정치부 차장입력 2020.05.26 03:16
"다선(多選) 의원으로 살아남는 비법을 가르쳐줄 테니 우리 모임에 들어오세요."
최근 미래통합당 한 초선(初選) 당선자 A씨는 한 중진 의원의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이 의원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 당에서는 편한 사람들끼리 그룹을 형성해야 오랫동안 의정 생활을 할 수 있다"며 앞으로 자신이 주재할 모임에 반드시 나오라고 했다. 4·15 총선 참패에 대한 반성이나 당 혁신 방안을 찾기 위한 자리라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A씨는 순간 '이게 바로 계파라는 건가'라고 직감했다. A씨는 "고민해보겠다"며 일단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이 망해가는데 다선 타령이 웬 말인가…"
미래통합당의 이번 총선 패배를 두고 "젊은 세대와 소통이 부족했다" "극단적 지지층과 이념에 갇혀있었다" "미래 비전을 제시 못 했다" 등 분석이 쏟아진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A씨의 푸념은 보다 근본적인, 그래서 더욱 극복하기 힘든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당이 무너져도 내 선수(選數)만 쌓이면 된다'거나 '공동체 생존보다 내 이익이 우선'이라는 식의 '속물적 이기주의'가 그것이다. 국민에게 이름도 낯선 일부 중진들은 선거 참패 후에도 앞다퉈 '내가 당 대표감'이라며 대대적 당 개혁을 예고한 '김종인 비대위' 출범을 한 달여간 지연시키고 아직도 훼방 놓으며 착란적 탐욕을 보여주고 있다. "막말로 선거 말아먹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당 징계는 부당했고 나는 떳떳하다"고 외치는 후보들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쪽에서는 당 대변인 출신 의원이 "과거에 발목 잡혀있으면 당의 미래가 없다"는 만류에도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극단적 지지층을 독려하며 '사전 투표 조작론'을 설파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가가 권력을 추구하거나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대의(大義)에 헌신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통합당에서 이런 근원적 소명 의식은 장기 실종 상태다. '정치는 원래 권력 투쟁'이라며 국민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분을 벌이거나 뒤에서 조용히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자리와 자잘한 이권을 챙기는 게 거듭된 일상이었다. 헌신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유권자에 대한 상식적 예의가 있다면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사적 욕망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장 내정자는 최근 펴낸 책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 60년대 초반 할아버지 김병로 선생을 만나기 위해 집을 오가던 정치 지망생들 얘기를 꺼냈다. 하루는 김 내정자가 대기하던 이들에게 넌지시 "무엇 때문에 정치를 하시려는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이렇게라도 해야 주머니에 용돈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김 내정자는 "반세기가 지났지만 우리 정치는 이런 측면에서 본질상 크게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다" "어디에 줄 댈 것인지 항상 고민하는 사람들의 정치는 국민으로서 불행"이라고 했다. 대의 추구는커녕 속물근성이 주류 정서처럼 보이는 근래의 통합당이 떠오르는 일화다. 이런 김 내정자의 당 혁신이 온전한 체질 개선으로 이어지려면 구성원들의 각성과 자립이 필수다.
작년 말 불출마를 선언한 민주당 표창원 의원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조국을 옹호하는 상황이 힘들어 결단했던 것"이라며 "초선 때부터 재선에 얽매이면 국가와 국민은 헛구호가 될 수 있으니 소신을 얘기해야 한다"고 했다. 상대 정당 인사의 발언이지만 통합당 당선자들도 마음에 새겨둘 만하다. 유권자들이 통합당에서도 대의와 소신의 작은 싹이라도 발견할 때 비로소 선거 승리를 논할 자격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선언한 '익숙했던 과거와의 결별'이 시작되는 지점도 바로 이 언저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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