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위기의 금융 허브 홍콩
by 조선일보 김홍수 논설위원입력 2020.05.26 03:18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홍콩 배우 주윤발이 중국의 전설적인 해적 두목으로 등장한다. 청나라 때 실존 해적 장보(張保)를 모델로 삼았다는데, 그의 주 활동 무대가 지금의 홍콩이다. 해적 소굴이던 홍콩이 뉴욕, 런던과 더불어 세계 3대 금융 허브로 재탄생한 출발점은 아편전쟁이었다. 영국의 승리로 155년간 영국 땅이 된 홍콩에 영국 상공인들이 진출해 1865년 은행을 만들고 새 화폐를 발행했다. HSBC(홍콩상하이)은행과 홍콩달러다.
▶1937년 중일전쟁 전까진 상하이가 아시아 금융센터 역할을 했다. 전쟁 탓에 상하이가 쇠락하면서 홍콩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HSBC은행은 홍콩달러 발권 은행이란 독특한 지위를 바탕으로 홍콩을 아시아 금융 허브로 키워 나갔다. 1980년대에 등장한 중국의 개혁 개방 노선은 홍콩에 서방 기업들의 중국 진출 교두보라는 지위도 새로 부여했다.
▶홍콩의 성장은 1997년 영국의 홍콩 반환 이후에도 계속됐다. 홍콩의 금융 허브 기능이 아쉬운 중국 정부가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를 표방하며 홍콩에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했다. 홍콩 금융 산업을 더 키우기 위해 중국 본토 기업 주식을 홍콩 증시에서도 거래할 수 있게 하고, 위안화 채권 발행 시장까지 홍콩에 개설했다. 이런 지원 덕에 중국 기업의 해외 기업공개(IPO) 중 70%가 홍콩에서 이뤄지고 있어 홍콩은 세계 1위 IPO 시장으로 등극했다.
▶홍콩 GDP의 20%를 책임진 금융 산업이 작년 6월 범죄인 송환법 시위 사태로 위기를 겪었다. 홍콩의 미래에 불안을 느낀 부자, 금융인들이 홍콩을 떠나기 시작했다. 40억달러가 넘는 예금을 싱가포르로 빼돌리고, 영국 황금 비자(golden visa)를 얻기 위해 영국 대사관으로 달려갔다. 황금 비자는 영국 기업에 200만파운드(약 30억원) 이상 투자하는 외국인에게 5년 이상 거주권을 준다. 지난해 홍콩인들이 황금 비자를 얻는 데만 10억파운드(약 1조5000억원)를 썼다고 한다.
▶홍콩이 다시 폭풍 전야다. 중국 정부가 홍콩 내 반중국 활동 처벌법 제정을 추진하자, 미국이 홍콩 특별 대우를 폐지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1992년 제정 홍콩정책법에 따른 홍콩 수출품 관세 면제와 홍콩 시민 비자 발급 등 특별 대우를 없애 금융 허브 기반을 흔들겠다는 것이다. 미국 백악관 경제 참모들은 "외국 자본과 두뇌의 유출로 홍콩은 금융 허브 위상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편전쟁이 낳은 아시아 금융 허브가 미·중 경제 전쟁으로 전례 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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