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재훈의 실리콘밸리 인사이더] 그곳에선 절대 '눅눅한' 피자 먹을 일 없다
음식 문화와 푸드테크, 실리콘밸리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
스시+부리토, 탄두리 치킨+피자 등 성공… 다양성·개인화 특징
유명 커피 체인에도 벤처 투자… 음식에 신기술 접목도 큰 흐름
by 조선일보 음재훈 실리콘밸리 벤처투자가입력 2020.05.26 03:12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고 외출도 거의 불가능하다 보니 평소보다 먹을 것 생각이 더 자주 난다. 실리콘밸리의 음식 문화와 푸드테크(food tech)는 이곳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실리콘밸리는 먹는 문제도 창업자가 해결하고 벤처 캐피털이 투자한다.
이곳 음식 문화의 특징은 '다양성'과 '개인화'다.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의 문화가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스시(초밥)와 멕시코의 부리토를 합한 '스시리토', 인도의 탄두리 치킨을 피자에 올려 구운 인디언 피자 같은 퓨전 음식이 성공하는 이유다. 온라인으로 음식을 주문할 때도 종교·건강 등의 이유에 따라 다양한 맞춤형 선택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샐러드드레싱을 버무리지 말고 따로 달라거나, 샌드위치에서 양파를 빼달라거나, 고단백질 다이어트를 하고 있으니 닭가슴살을 두 배로 넣어 달라는 식이다. 집에 손님을 초대할 때도 미리 알레르기나 가리는 음식이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한식을 차릴 때는 소고기를 먹지 않는 인도인이나 돼지고기를 안 먹는 유대인을 위해 두부 요리, 고기를 뺀 잡채도 같이 준비한다.
구글, 페이스북 같은 테크 대기업 본사의 '최고급 구내식당'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직원이나 이들과 동행한 손님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구글이 처음 시작한 것으로 엔지니어들이 다른 생각 하지 않고 건강한 영양식을 먹으며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애플 본사 구내식당에 가보면, 먹는 데서도 애플 특유의 '장인 정신'을 느낄 수 있다. 2010년 특허를 출원한 피자 담아주는 박스가 대표적이다. 정사각형 골판지를 사용하는 여느 피자 박스와 달리 섬유 재질의 동그란 모양이다. 바닥에는 골이 파여 있고 뚜껑에는 숨구멍 8개가 나 있다. 덕분에 '애플에서 차가운 피자는 먹을지언정 눅눅한 피자는 절대 먹을 일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유명 커피 업체도 스타트업 출신이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블루보틀 커피는 오클랜드, 이 동네에 마니아가 많은 필즈(Philz) 커피는 샌프란시스코에 본사가 있다. 두 곳 모두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초기 벤처 투자를 받고 성장했다. 커피숍 체인에도 벤처 투자를 하나 의아해할 수 있지만, 블루보틀에 초기 투자한 이들은 창업자의 비전과 실행력, 엄청난 커피 시장의 규모와 성장성을 보고 투자를 결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스타벅스의 시가총액은 1000억달러(약 122조원)에 육박할 정도다. 블루보틀도 크게 성장했고, 결국 네슬레가 2017년 7억달러(약 8500억원)의 기업 가치로 경영권을 인수해 초기 투자자들은 짭짤한 수익을 냈다.
음식에 기술을 접목하는 푸드테크도 돋보인다. 몇 년 전 후배 한인 창업가가 소개해준 '소일렌트(Soylent)'라는 음식은 인상적이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출신 창업자가 만든 식사 대용 음료인데, 미 농무부의 영양 권장 정보에 따라 생존에 필요한 생화학적 요소 물질을 배합해 만들었다. 성공적인 크라우드펀딩(온라인 소액 투자)을 받아 제품이 출시됐고, 2015년 실리콘밸리 대표 벤처 투자사 중 하나인 앤드리슨 호로위츠로부터 2000만달러(약 244억원) 투자를 받았다. 촉박한 제품 출시 일정 때문에 코딩에 매달리느라 일분일초가 급한 엔지니어들이 아예 박스째 사다 놓고 끼니를 때운다고 한다. 워낙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나에게 맞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음식·농업 분야에 뛰어든 스타트업도 많아졌다. 식물성 단백질로 만든 대체 식품, 노동 집약적인 농업을 자동화해주는 애그테크(Agtech), 생산·유통 과정을 블록체인(위·변조가 불가능한 데이터 분산 저장 기술)으로 검증하는 기술 등이다. 특히 식물성 고기 업체들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스탠퍼드대 생화학 교수 출신이 차린 '임파서블 푸드'와 작년에 상장한 '비욘드 미트'는 현재 기업 가치가 5조~8조원에 달한다. SRI(스탠퍼드 연구소)에서 분사한 '어번던트 로보틱스'는 사과 농장에서 잘 익은 사과만을 골라 따는 AI 로봇을 상용화했다. 로봇·드론을 이용한 음식 배달도 코로나 국면에서 확산됐는데, 엄청난 규모의 현장 테스트를 거치며 많은 기술적 문제를 해결했고 사업적으로도 가치를 검증했다. 앞으로 많은 분야에서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로봇 도입 논의가 더 활발해질 것으로 본다. 글을 쓰다 보니 출출해졌다. 다음 끼는 무엇을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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