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칼럼]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선관위가 재검표에 나서고 사정 당국에 의문 제기된 곳
법적으로 들여다보면 진상은 규명될 수 있어
문제는 선관위가 이미 신뢰를 잃었다는 것
by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니스트입력 2020.05.26 03:20
"컴퓨터(로 진행한) 투표와 개표는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위헌'이다. 일반 비(非)전문가인 시민이 전 선거 과정을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공개성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판결이다." 박광작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가 지난 15일 SNS에 2009년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공유하면서 올린 글이다.
이 판결의 영문(英文) 골자를 보면 헌법재판소는 2005년 실시한 독일 연방 하원 의원 선거에서 컴퓨터로 결정된 투·개표에 항의하는 시민 고발 사건 2건을 판시하면서 "그 사안에 '전문적 지식'이 없는 시민에 의해 투표의 핵심 과정과 개표 결과가 검증되는 것이 요구된다"고 했다. 즉 투·개표의 모든 과정은 헌법상 예외 규정이 없는 한, 시민적 재검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판결에서 주시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선거의 공공성(public nature of elections)'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의 재검표 권리이다. 특히 투·개표 과정에 대해 전문적 지식이 없는, 다시 말하면 이해관계자가 아닌 '일반 시민의 재검표 요구'를 수용한 것이 중요한 대목이다. 선거가 권력자나 이해관계자끼리 하는 게임이 아니고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공공 행사라는 의미인 것이다. 즉 컴퓨터 서버니 QR이니 바코드니 하면서 일반 국민이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을 설정해놓고 자기들만의 '암호'처럼 까불어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의문이 있는 시민은 구체적 증거 없이도 누구나 언제나 투·개표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고 '다시 보기'를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표를 찍는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표를 세는(count)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투표하는 사람은 자기 표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개표하는 과정에서 어떤 인위적 작용에 따라 승리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선거의 맹점이고 함정일 수 있다. 권력을 쥔 세력에 어떤 자제와 제어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연목구어다. 고금을 통해 권력을 쥐면 자기 아닌 상대방은 모두 적폐로 몰 수 있다. 또 법도 바꾸고 죽은 사람도 살리고 살아 있는 사람도 죽일 뿐 아니라 돈도 벌고 좋은 자리도 차지하는데 왜 굳이 정직한 척할 필요가 있겠는가.
현실로 돌아와 우리는 지금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다. 4·15 총선에서 투·개표 부정에 관련된 문제점, 특히 사전 투표의 문제점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대부분의 통계학자도 통계상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투표용지가 야당 의원 손에 들어가고, 개표한 용지가 빵 상자 속에 처박혀 있었다. '빳빳한 신권 다발처럼 묶인 사전 투표지'를 고발한 변호사도 있다. 그럼에도 여야 정치권은 물론 친여·친야 사이에서 공방만 난무하고 있고 정작 그 여부를 가릴 선관위는 팔짱을 끼고 있다. 가관인 것은 야권 내에서 '부정이 있다 없다'로 인신공격이 계속되고 야권의 유튜버 사이에서도 '사쿠라 논쟁'이 일고 있다. 보수·언론 내에서도 부정 여부를 둘러싸고 자해적(自害的) 논쟁이 일고 있다.
선관위가 재검표에 적극 나서고, 의문이 제기된 곳을 사정 당국이 법적으로 들여다보면 진상은 규명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다. 선관위는 이미 신뢰를 잃었다. 문재인 대선 캠프에 있던 인사가 선관위원이 되고 야당 몫 선관위원 자리가 공석인 상황에서 선관위가 의혹을 밝히는 데 나설 것인지는 미지수다. 이미 제기된 재검표 요구 등 139건의 선거 무효소송을 어떻게 수용할는지도 불투명하다. 검찰의 권력 감시 의지는 아마도 '조국 사태'까지일 공산이 크다. 검찰의 기(氣)는 이미 꺾인 듯하고 강직한 검사는 이제 소수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집권당이 심취해 있는 '4·15 승리'에 칼을 들이댈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 나라 사법의 총책인 대법원은 국민 사이에서 권력의 하수인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이런 와중에 선거 부정을 제기하는 것조차 공연히 일을 만드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다. '또 선거 부정 타령이냐'는 일부 비아냥에 문제는 덮이고 있다. 우리에게 독일 헌법재판소 판결 같은 한 줄기 '소나기'는 없을까? 우리에게 선거 부정을 고발할 내부의 용기는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표를 찍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상은 요원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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