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75] 그들은 알고 있다
by 조선일보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입력 2020.05.26 03:12
책을 쓸 요량으로 몇 년째 동영상 자료를 모으고 있다. 유리병에 머리가 끼인 여우가 길 한복판에 앉아 있다가 사람들이 다가오자 한 치도 머뭇거림 없이 직선거리로 달려와 머리를 들이댄다. 한 사람이 여우의 목덜미를 잡고 조심스레 병을 빼자 쏜살같이 숲으로 도망간다. 평소에는 사람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텐데 곤경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찾은 것이다.
하와이 근해에서 쥐가오리 군무를 구경하는 관광객들에게 큰돌고래 한 마리가 다가온다. 온몸이 낚싯줄로 감겨 있고 가슴지느러미에는 낚싯바늘이 박혀 있었다. 자칫하면 지느러미를 잘라낼 수도 있는 절단기를 든 잠수부에게 돌고래는 무서워하기는커녕 몸을 비틀어가며 불편한 부위를 드러내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존재는 동료 돌고래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듯 보인다.
멕시코 앞바다에서 작살 낚시를 하던 잠수부들이 그물에 걸린 거북이를 구해주는 동영상도 있다. 가까스로 풀려난 거북은 저만큼 헤엄쳐가더니 이내 되돌아와 자기를 풀어준 잠수부와 한참 눈을 맞춘다. 잠수부는 거북의 머리를 쓰다듬고 겨드랑 부위를 어루만져 주었다. 이 모습이 자기를 풀어준 잠수부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행동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동물들이 우리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25만년 전 아프리카 초원에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존재감이 없었지만 그 후 이처럼 막강해지는 동안 그들이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결코 가까이하고 싶지 않지만 다급하면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책 제목을 'They know(그들은 알고 있다)'로 붙였다. 잘 모르는 존재는 무심코 해칠 수 있지만 서로 잘 아는 사이가 되면 쉽사리 해치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모르는 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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