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어둠 속의 피아니스트
by 조선일보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입력 2020.05.26 03:10
어둠 속에서 홀로 꿋꿋이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은 아직도 눈과 마음에 남아 잊히지 않는다. 낭만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연주 도중 무대가 암전된 끔찍한 내용이다. 2010년 쇼팽 콩쿠르에 참가한 율리아나 아브제예바의 이야기다.
여성 참가자인 아브제예바는 정장 바지와 남성적인 연주 스타일로 대회 내내 주목받았다. 전통적인 쇼팽보다는 새로운 유형의 쇼팽을 연주해 심사 위원에게 어필했다. 그리고 결선 무대까지 진출하며 우승 후보로 떠올랐다.
결선 무대에서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다. 깜빡깜빡 불안했던 무대 조명이 연주 도중 갑자기 꺼진 것이다. 결선 과제곡인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을 연주하던 중이었다. 암전에 객석은 동요했다. 심지어 가장 연주하기 까다로운 부분에서 불이 꺼졌다. 열 손가락이 나아가야 할 길이 어둠에 갇혔다.
하지만 아브제예바는 동요하지 않았다. 음악은 계속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아브제예바는 음악에 더욱 손을 내밀었고, 음악도 그녀에게 더욱 의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로지 그녀만의 시간이 무대에 펼쳐졌다.
다행히 단시간 내에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암전됐던 시점에 멈췄다. 짧은 시간이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던 그녀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번개는 번쩍 지나갔어도 눈에는 잔상이 남는다. 그녀는 결국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언론은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후 45년 만에 우승한 여성 피아니스트라 전했고, 내 마음엔 어둠 속 피아니스트로 자리 잡았다.
2014년 아브제예바의 서울 공연이 있었다. 내 가방 안에는 쇼팽 피아노협주곡 악보가 들어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악보에 사인을 받으며 말을 건넸다. "당신을 떠올릴 때면 늘 어둠 속의 연주가 먼저 생각납니다. 그래서 이 악보에 당신의 사인을 받는 건 저에게 특별한 일입니다." 그녀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긴 사인회 줄에 정신이 없어 전부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녀가 말한 몇몇 단어는 머리에 남았다. "비록 어둠 속일지라도 음악은 흘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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