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그 상자,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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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애니 앳킨스 손길 거친
영화 속 디테일 살린 소품 170점
제작 과정·다채로운 이야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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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분홍 박스에 선홍색 글씨로 쓰인 ‘MENDL’S’.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소품이다. 영화에선 소년 벨보이 제로가 ‘멘들스 박스’를 이용해 호텔 지배인 구스타브의 탈옥 도구를 숨기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가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이베이에 모조품이 판매되기도 했다. 하지만 상자에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깨알 같은 디테일이 숨어 있다. 제과점을 뜻하는 ‘patisserie’라는 단어에 ‘t’가 하나 더 들어 있는 것이다. 사실은 디자이너의 실수였다고 한다. 급하게 수정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영화의 ‘히어로 소품’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지난 11일 출간된 <애니 앳킨스 컬렉션>(시공아트·사진)은 영화·드라마 전문 그래픽 디자이너 애니 앳킨스가 만든 170여점의 소품과 제작 과정을 한데 모은 책이다. 요즘 잘나가는 K팝 뮤비나 화보의 독특한 색감과 스타일에 영감을 준 매체로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꼽히곤 한다. 2015년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술상을 수상한 이 영화에서 주브로브카 공화국의 화폐와 우표, 멘들스 박스 등을 제작한 게 바로 앳킨스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냉전시대 뉴욕을 배경으로 만든 <스파이 브릿지>, 치밀한 고증으로 주목받은 헨리 8세의 역사드라마 <튜더스> 역시 그의 손을 거쳤다.

봉준호 감독의 별명인 ‘봉테일’을 떠올려보자.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소품들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지만, 그러한 디테일이 하나둘 쌓여 영화의 미장센을 만든다. 때로는 이야기를 촉발시키는 중요한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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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아티스트 애니 앳킨스(위 사진)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소품을 디자인했다. 영화에서 마담 D가 보낸 편지의 입술 자국과 등장인물(틸다 스윈턴·세 번째 사진)의 입술 색깔과 맞추기 위해 스윈턴의 립스틱을 빌리는 등 제작 과정을 거쳤다. 시공아트·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주인공을 모험으로 인도할 보물 지도가 프린터에서 인쇄된 조악한 한 장짜리 종이면 이야기가 개연성을 가질 수 있을까? 30년 만에 발견된 아버지 편지가 말끔한 데다 현대적인 서체로 쓰였다면? 책에선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그래픽 소품들이 어떻게, 얼마나 많은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소개한다. 이를테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마담 D가 보낸 편지의 입술 자국을 등장인물의 분홍색 입술 색과 맞추기 위해 배역을 맡은 틸다 스윈턴의 립스틱을 빌리고, 문서는 오래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찻물에 5분 동안 담가놓는 섬세한 과정을 거쳤다. 맑고 선명한 피, 흐르는 피, 스며 나는 피, 걸쭉한 검은 피 등 갖가지 색조와 농도를 내기 위해 다양한 시럽과 식품 착색제를 이용하는 것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들이다.

그럼에도 할리우드에서 1980년대까지 그래픽 디자이너의 이름이 엔딩 크레디트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관객들도 영화 속 그래픽 디자인의 중요성을 간과하곤 한다. 하지만 소품들에 담긴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달라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