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정치를 하다](2)‘불쾌한 정치’ 단호히 거부…자신만의 이야기로 펼칠 ‘새로운 정치’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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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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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오바마는 ‘정치의 불쾌한 측면’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공직을 거부했지만, 남편 버락 오바마를 뛰어넘는 전략가였다. 퍼스트레이디 역할이 끝난 그녀는 새로운 정치를 꿈꾸고 있다. 사진은 2012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는 미셸 오바마.

‘변화’ 오바마 연설에 미셸 ‘솔직한 이야기’ 더해지자 유력 대선후보와의 경쟁서 판세 역전…전략가의 탄생이었다

“사람들이 종종 내게 묻기에, 이 자리에서 확실히 대답해두겠다. 나는 공직에 출마할 의향이 없다. 전혀 없다. 나는 애초에 정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지난 10년의 경험으로도 그 생각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정치의 불쾌한 측면을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다.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편을 가르는 것, 우리가 양자택일을 한 뒤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에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 상대방의 말을 들을 줄도 타협할 줄도 모르는 것, 심지어는 교양 있게 행동할 줄도 모르는 것.”

힐러리 클린턴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40대의 버락 오바마가 “변화”를 슬로건으로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급부상하자 이내 기선을 제압했다. “변화를 현실로 이뤄낼 힘과 경륜이 없다면, ‘변화’란 한낱 속 빈 말에 불과합니다.” 부시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민주당원들은 정권교체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고, 힐러리는 그들에게 “이길 후보”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미셸 오바마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민주당 유권자들은 클린턴 부부를 잘 알았고, 승리에 굶주렸다. 내 남편은 이름이라도 제대로 발음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힐러리는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버락 오바마는 “10~20%포인트쯤” 뒤처져 있었다.

“완벽한 무명”이었던 버락 오바마는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기조연설로 파문을 일으켰다. “만약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에 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이가 있다면, 그건 저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제 자녀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약값이 없어서 약을 살지, 집세를 낼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다면, 그건 저를 더 가난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분들이 제 조부모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그는 ‘연설’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2007년 2월10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후보 경선에서는 연설에 더욱 힘을 실었다. “저는 공화당 미국과 민주당 미국을 맞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되고 싶은 것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입니다.” “우리의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쉽고 간명한 버락 오바마의 메시지는 청중들에게 빠른 속도로 퍼졌다. 깊은 여운을 남겼다. 힐러리 대세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편의 대선 출마를 끝까지 만류했지만, 버락 오바마의 진정성과 권력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미셸 오바마는 등판을 결심한다. 그녀는 유력한 민주당 대선후보와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미셸이 등장하자 힐러리와 자연스럽게 대결구도가 형성되었다. 동시에 “역사를 만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배우자로서” 미셸과 빌 클린턴은 “멋진 맞수”가 되어 승부를 펼쳤다. 미셸은 남편 이상의 전략가였다. 그녀는 정치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빌 클린턴이 2008년 1월26일 예비선거 하루 전 오바마를 공격하며 유세를 성황리에 마치자, 미셸은 약 한 시간 후 논평을 발표했다. “진심으로 변화를 원합니다. 논조 변화 말입니다. 분리를 조장하고 분열시키는 말, 서로 고립시키는 그런 논조에 변화가 필요합니다. 정치인들은 가끔 그런 분열에 의지하고 도구로 활용하지요.” 미셸은 ‘분열’과 ‘고립’을 클린턴 부부의 몫으로 할당했다. ‘통합’은 오바마의 언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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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은 버락 오바마의 선거캠프 내에서 문제 해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종결자’로 통했다. 그녀는 정치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대화’로 선거를 이끌어갔다.

오바마의 참모진은 “그녀에게서 버락에게는 없는 정치적 기술을 발견”했다. 문제 해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미셸은 선거캠프 내에서 “종결자”로 통했다. “우리가 불공정한 대접을 받는다거나 충분히 공격적으로 반격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미셸은 과감하게 나섰습니다.” 미셸의 연설 원칙은 분명했다. “솔직한 나 자신으로서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책을 읽는 흑인 여자아이는 백인 흉내를 내는 거라고 생각한 학우들로부터, 성적이 좋지 않으니 큰 꿈을 갖지 말라고 한 선생님들로부터,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성공이란 시카고 사우스사이드 출신의 작은 흑인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 동네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말들”을 들으며 자란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했다.

프린스턴대학과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와 시카고대학병원 부원장으로 살아온 이력도 당당하게 밝혔다.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면 반드시 “여러분의 삶을 제게 들려주세요”라고 청한 다음, 대통령 후보인 버락을 홍보했다. 미셸은 주저하는 유권자들을 오바마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저도 사람들이 ‘버락이라는 사람이 괜찮은 것 같긴 한데, 아직 미국이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는 안 된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저는 이해합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건 이 나라의 인종주의와 차별과 억압의 쓰디쓴 잔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유산입니다.” 버락의 연설에 미셸의 ‘이야기’가 더해지자 판세가 변화했다. “제가 이 주의 모든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은 모두 버락 오바마를 찍을 거예요. 저는 꽤 설득력이 있거든요.” 미셸은 ‘대화’로 선거를 이끌어갔다. 2008년 1월 말에 조 바이든과 존 에드워즈는 경선 후보에서 사퇴했고, 2월 중순부터는 오바마가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2008년 2월18일, 오바마의 선거운동 홍보실이 발칵 뒤집혔다. 미셸이 밀워키와 매디슨에서 한 약 40분 분량의 연설 가운데 10초 분량이 편집되어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저는 어른이 된 뒤 처음으로 내 나라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이 한 문장이 모든 매체를 덮었다. 언론은 매우 악의적인 의도로 전후 맥락을 삭제했다. 사실 미셸은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를 유권자들에게 털어놓았다. “우리가 지난 1년 동안 안 사실은, 희망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어른이 된 뒤 처음으로 내 나라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버락이 잘하고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국민들이 변화에 굶주렸다는 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기를 간절히 바랐고, 저의 이런 좌절감과 실망감이 저 혼자만의 기분이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오바마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보수 논객들은 미셸이 미국을 “자랑스러워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미셸 오바마는 애국자가 아니야. 그녀는 늘 미국을 미워했어. 저게 그녀의 본색이야. 나머지는 다 쇼야.” 미셸은 “죄책감이 들고 의기소침”해졌다. 다행히 버락 오바마가 상황을 직시했다. “자기 말을 들으러 오는 청중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그래. 자기가 선거운동에서 중요한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야. 그러면 사람들이 좀 물어뜯으려 하기 마련이거든.” 사실이었다.

여성·흑인·강인함을 ‘성난 사람’ ‘기득권 전복’이라 공격하며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미셸은 연단에 올랐다

미셸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녀를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보수 언론은 그녀의 20년 전 학부 졸업논문까지 뒤져내 “위험한 문건이라도 되는 듯” 보도했다. 미셸은 졸지에 남편을 통해 “백인의 기득권” 전복을 노리는 여성이 되어 있었다. 미셸은 현명했다. “나는 여성이고, 흑인이고, 강했다. 그런데 특정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그 사실이 ‘성난 사람’이라는 한 가지 뜻으로만 번역되는 듯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유해하고 진부한 고정관념이었다. 소수 인종 여성을 모든 분야에서 주변부로 내모는 데 사용되어온 고정관념, 우리 같은 여성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는 생각을 무의식에 심는 고정관념이었다. 나는 이제 실제로 화가 좀 났다. 그래서 기분이 더 나빴다.” 미셸의 분노는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선거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2008년 6월3일 버락 오바마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한 번 추락한 미셸의 이미지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선거본부는 미셸에게 역전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받아들였다.

2008년 8월25일 덴버에서 개최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미셸은 여성 투표권 쟁취 88주년과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 45주년을 기념하여 이렇게 연설했다. “제가 가진 미국의 꿈 한 조각은 앞선 분들의 힘겨운 투쟁으로 얻은 축복임을, 그 모든 분들이 가진 신념은 매일 아침 출근하기 위해 한 시간 일찍 일어나 힘겹게 옷을 꿰입으시던 제 아버지가 가졌던 신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또한 이 나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만났던 모든 남성과 여성의 신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청중들의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여론조사 수치는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이번에도 연설에 해답이 있었다. 약 3개월 뒤인 2008년 11월4일, 오바마는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미셸은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백악관에 입성한 최초의 흑인 가족들을 위해 “눈물을 글썽이며 축하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기억하고자 했다. 역대 미국 최고의 퍼스트레이디가 누구인지 완전히 판가름 났다. 2012년 11월6일,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편 가르며 타협도 교양도 모르는 정치” 신랄하게 비판하며 작가·기획자로 변신…이제 그녀의 새 행보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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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오바마는 남편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잔뜩 품고서” 자서전 <비커밍(Becoming)>을 출간했다.

미셸은 새로운 정치를 꿈꾸기 시작한다. 퍼스트레이디 역할이 끝나갈 무렵 그녀가 몰두한 일은 ‘렛 걸스 런(Let Girls Learn)’ 출범이었다. 1964년 시카고의 노동계층 출신의 흑인 소녀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전문직에 종사하며 미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었지만, 전 세계의 약 9800만명의 소녀들이 여전히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미셸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급한 문제였다.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체면을 따지지 않기로 한다. “범정부 차원에서 수억달러의 자원을 융통”하고, “다른 나라 정부들에 로비를 벌이고, 사기업들과 싱크탱크를 설득”하는 한편, 유명 인사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달라는 부탁도 서슴지 않았다. 미셸은 “우리가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에 대한 온정이 주는 위안을,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걸 지켜볼 때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내 딸들을 위한 노래(This is for my Girls)’를 부르고 때로는 춤을 추며 카메라 앞에 선다. 오바마 대통령 퇴임 후,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잔뜩 품고서” 자서전 <비커밍(Becoming)>을 출간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기획자가 된 미셸 오바마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정치의 불쾌한 측면”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공직을 단호하게 거부한 미셸 오바마. 그녀가 펼칠 새로운 정치를 기대한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는 우리가 각자 갖고 있는 자산, 언제까지나 갖고 있을 자산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소유한다.” 미셸에게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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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장영은

성균관대학교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 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