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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에서 건춘문 앞 중학천을 끼고 남쪽으로 동십자각이 보이는 풍경이다. 1940년경 조선말기의 이 사진을 보면 송현동의 위치는 지금보다 높은 위치에 언덕 모양으로 있다. 경복궁의 담장 모서리 끝에 동십자각이 있고 개천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는데 그 뒤로 미루나무 언덕과 일제시의 관사건물들이 높은 언덕 위에 보인다. 글·사진제공 김원

[왜냐면] 대한항공의 송현동 부지를 보며 / 김원

김원 ㅣ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서울시가 송현동 땅을 매입한다는 소식에 대단히 반가웠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정부와 반반씩 부담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시에 큰 부담이 되겠다 싶었다. 기업이 2900억원에 산 땅을 10년 만에 5천억원에 팔겠다는 자세는 옳지 않다. 서울 한복판의 금싸라기 땅이라지만 세계적 기업이 그것을 팔아 “재무구조를 개선”하겠다는 데 창피함을 느낀다. 대한항공은 우리의 세계적 기업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국가와 국민의 도움이 컸다. 정부는 모든 공무출장을 대한항공에 국한했고 온 국민이 국적기를 선택했다. 나 자신도 밀리언 마일러가 되도록 다른 값싼 항공편을 알면서도 대한항공을 타곤 했다. “대한”이라는 나라 이름의 상호와 태극문양이 자랑스러웠다. 그게 혼자 힘으로 큰 게 아니다. 그런데도 꼭 땅장사를 해야겠다는 잡상인적 사고가 실망스럽다.

송현동(松峴洞)은 이름대로 소나무 언덕이었다. 정도전이 경복궁과 창덕궁을 배치할 때 두 궁 사이에 완충지대로 남겨둔 곳이다. 조선왕조는 경복궁에서 시작되었지만 대부분 임금들은 창덕궁을 선호하였다. 경복궁에 비해 창덕궁은 노출이 덜하고 훨씬 안온하다. 바로 이 소나무 언덕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왕기(王氣)가 서린 곳이다. 나의 중학교 시절에도 소나무는 이미 깎여 나간 뒤였고, 지금은 완전히 흉물이 되었다.

땅에도 존엄성이 있고 팔자가 있다. 아무 땅에나 아무 짓이나 했다가는 패가망신한다는 풍수지리설을 우리 민족이 오래 신봉해온 까닭이 있다. 땅도 사람처럼 팔자에 맞게 쓰여야 한다. 이곳은 한 개인이나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는 데 쓸 땅이 아니다.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용도로 쓰여야 한다. 그러려면 물론 ‘숲·공원’이 정답이다. 그러나 이 땅의 가치로 보아 숲·공원만으로는 부족하다. 훌륭한 문화시설이 함께 들어서서 공원의 가치를 증폭시켜야 한다.

땅을 많이 차지하지 않고 문화를 향수할 기능으로 나는 콘서트홀을 제안하고 싶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정명훈을 시향 지휘자로 영입할 때 콘서트홀 건립을 약속했다. 정명훈은 시향 명성을 높여 약속을 지켰으나 시장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서울만한 문화도시에 음향 좋은 콘서트홀 하나가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많은 연주자들이 서울 연주를 청하면 음향 좋은 음악당이 없다며 사양한다고 들었다. 세계적인 공연장인 일본 도쿄 ‘산토리홀’은 위스키 회사가 지었는데 우리는 그런 술장사가 없을까. 나는 연전에 독일 함부르크시 음악당 준공 기사에 감동했다. 인구 170만 항구도시가 10년 동안 공을 들인 그 열망에 또 한번 부끄러웠다. 공사비 7천억원의 4분의 1이 시민 모금이었다. 우리가 함부르크보다 못한가?

민속박물관도 좋지만 새로 짓기보다는 송현동과 현대미술관 사이 사간동의 동네 전부를 매입하여 한옥과 골목길들을 활용한 민속박물관 거리를 만들면 근사할 것이다. 돈의문에서 시도한 방식으로 하면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연결된 야외조각전시장을 만드는 예술공원도 생각해봄 직하다. 도심 숲속의 조각정원이 되면 서울은 어디 내어놓아도 번듯한 예술도시라는 인정을 받을 것이다.

국가영빈관 신축도 생각해볼 만하다. 외국 원수들이 올 때마다 시내 호텔에 묵는다니 이번이 멋진 영빈관을 세울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의 높이 4m, 길이 800m 이상의 거대한 담장은 한마디로 불법구조물이다. 매일 많은 시민이 지나다니는 율곡로 북쪽을 가로막아 북한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권리를 빼앗고 있다. 엄청난 조망권 침해다. 옛날에는 미합중국 소유였으므로 국경 개념으로 담을 높이 쌓고 미국 해병대가 지켰었다. 지금 이 땅이 우리에게 넘어온 이상 정부(종로구)의 구조물 허가를 새로 받거나 그러지 않으면 현행법상 불법이다. 여러번 종로구청에 철거명령을 제안했으나 아무도 꿈쩍 않고 있다. 나는 이 글이 공개된 뒤에도 이 불법구조물이 철거되지 않으면 대한항공과 종로구를 고발할 작정이다.

한마디로 이 땅은 ‘땅콩’과 ‘갑질’로 얼룩진 한진일가에 맡겨둘 땅이 아니다. 국민 모두의 공공재다. 좋은 데 쓰시라고 선뜻 내어놓는 것도 작금의 부끄러운 사태에 대한 속량도 될 것이다. A380 기종이 4억달러 정도라니 5천억원이면 에어버스 한대 값이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Please activate JavaScript for write a comment in Liv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