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정치적으로
[독서에세이] 알랭 바디우의 '사랑예찬'을 읽고
by 이인미(goodwood)위험해서 사랑이다
1937년생 할아버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지금도 정치에 활발히 참여하는 프랑스 철학자다. 그가 아비뇽 페스티벌 니콜라 트뤼옹(Nicolas Truong)의 공개 대담 제의에 응했다(2008년). 대담의 주제는 사랑. 대담 내용이 <사랑예찬>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사랑예찬>은 매우 얇은 책이다.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해제를 제외하고 본문만으로는 100쪽 남짓이다. 글자는 적당히 크고, 행간은 여유있고, 여백도 넓직하다. 그리고 질문과 응답으로 구성돼있어 흥미롭게 읽힌다. 게다가 주제가 '사랑예찬'이니, 맘만 먹으면 진도 빨리 뺄 수 있는 책이다.
책 첫머리의 주제는 '안전한 사랑'이다. 바디우는 안전한 사랑 따위는 없다고 단언한다. 나아가 각종 데이팅 사이트들이 주장하는 안전하고 위험 없는 사랑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하여 우리들이 저항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랑에 관한 한 "안전과 안락에 대항하여 위험과 모험을 다시 창안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바디우의 문제의식을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사랑에서 모든 중요성을 박탈해버리는 것, (···) 이런 것들이 사랑으로 촘촘히 짜여진, 타자에게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험을 완전히 회피하려 한다는 데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위험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18쪽
위험부담 없이 안전하게 사랑이 전개되면 좋겠다는 대중적 소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말이다. 그런데, 이 같은 바디우의 말은 사실, 사랑에 대한 비현실적 환상(착각)을 깨뜨리는, 매우 현실적인 아이디어다.
거절당할 위험, 배신당할 위험, 기만당할 위험, 무시당할 위험, 침해당할 위험···. 사랑에는 온갖 종류의 위험들이 존재한다. 위험하지 않은 전쟁터가 없듯 위험하지 않은 인생이 없으며, 위험하지 않은 사랑도 없다.
위험하단 이유로 인생 자체를 대번에 포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사랑에서도 우리는 그래야 한다. 바디우는 또다시 강조한다. 위험하니까 사랑이 중요하고, 위험하니까 사랑이 도전할 만한 것이라고···.
바디우는,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상대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위험을 느낄지라도 '인간은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부러 위험한(?!) 상대를 골라 사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이 애초에 "격렬한 실존적 위기"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말이다. 바디우는, 사랑의 상처라는 재앙을 피하려고 사랑을 체념하거나 유보하거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앙"이라고 역설한다.
정치적으로 사랑하라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을 '동류'로 놓는다. 그는 "정치와 사랑 사이의 근접성은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입니다"라고 감탄한다. 그는 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한다.
정치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질문 안에 들어있습니다. 결집되고 조직되었을 때 개인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가? 사랑에서는 두 사람이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창조적인 것으로 변화시켜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65~66쪽
바디우는 정치의 지평 어딘가에 권력(국가)이 존재하고, 사랑의 지평 어딘가에 가족이 존재한다는 점을 환기한다. 바디우가 지적하는 바, 정치는 정권창출을 위해 움직일지라도 그것의 목표가 반드시 권력(집권)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가족을 이루기 위해 시작되는 듯 보여도 사랑의 목표가 반드시 가족을 형성하는 게 아님은 물론이다.
바디우는, 정치적 희망에 비추어 국가가 거의 매번 실망을 안겨주는 것처럼, 가족 또한 사랑을 좌절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꼬집는다. 가족관계 안에서 인생 최초의 상처를 받아, 사랑과 인간관계에 관련된 트라우마를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얼마나 흔한지.
이윽고 바디우는 '정치적으로 사랑하라' 권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은, 나의 세계와 내 연인의 세계(두 세계의 차이)를 경험하려는 일생일대의 목표를 향해 진지하게 나아가는 인생 속 '사건'이다. 바디우는 강조한다. "사랑의 크고작은 사건들은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충돌을 가장 확연하게 겪게 되는 경험"이라고.
정치의 목표는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지, 권력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서도 그 목표는 차이의 지점인 (지점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하나 빠짐없이 경험해나가는 것이지, 종의 재생산을 확보하는 데 놓여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67쪽
이 책은 비교적 신속하게 후루룩 완료할 수 있는 1회차 독서 이후 책꽂이에서 잠자고 있어도 괜찮은 책 부류에 결코 들지 않는다. 곱씹어 읽을 필요가 있다. 도대체 사랑을 '왜' 해야 하고, '왜' 멈추지 말아야 하는지 사색할 마음이 일었을 때 이 책은 거의 '참고서'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 공들였던 사랑이 깨졌을 때, 사랑에 대한 감이 떨어질 때, 사랑이 불필요하다 느껴질 때, 사랑이 두려울 때, 이 모든 때에 읽으면 좋다.
집권이 아니라 '정치'를 겨냥하고, 바로 그 관점을 토대로 하여 결혼예찬이 아닌 '사랑예찬'을 하기 때문이다. "시련을 받아들이고 지속될 것을 약속하며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의 경험을 수용해나가는 모든 사랑"을 예찬하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저는 타자와 함께하는 행복의 원천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직접 봅니다. -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