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는 끝났다? 아니, 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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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잡지 ‘한편’ 문예지 ‘문학3’ 등
젊은 필자 목소리로 2030에 인기
산업 전체 매출, 24.7% 줄었지만
정기구독 비율·판매 수입은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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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의 모토는 최소주의로, 생산이 한계에 다다른 세상에 한 권의 종이잡지를 더하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넣었다. …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한편을 통해, 지금 이곳의 문제를 풀어 나가는 기쁨을 저자와 독자가 함께 나누기 위해서.” 트위터에 새 글을 쓸 때 접하는 문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같은 일이 최근 출판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종이잡지의 종말이 얘기되는 시대에 여전히 잡지를 찍는 것도 모자라 매체를 창간하고 있는 것이다.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젊은 잡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흐름이다.

지난 15일 출간된 민음사의 인문잡지 ‘한편’ 2호 ‘인플루언서’는 초판 5000부를 찍은 데 이어 19일 2쇄 3000부를 더 찍었다. 지난 1월 창간호 ‘세대’의 경우 입소문을 타면서 일주일 만에 초판 3000부가 매진됐고, 이달까지 누적 발행부수는 1만부에 달한다. 1호 ‘세대’에선 ‘페미니즘 세대 선언’ ‘청년팔이의 시대’ 등 동시대 세대 담론을 다뤘고, 2호 ‘인플루언서’에는 ‘네임드 유저’ ‘어린이의 유튜브 경험’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시대의 인문학을 살폈다. 첨단의 종이잡지라니 역설적이지만, 반응은 뜨겁다.

잡지의 핵심 키워드는 ‘당사자성’이다. 1년 정기구독자가 현재 3500명인데 구독자의 77%가 20~30대다. 기획위원 대신 ‘30대 초중반’ 편집자들이 선정한 다방면의 ‘젊은’ 연구자들이 10편의 글을 쓴다. 분량은 글마다 200자 원고지 30장 안팎. 가격은 1만원이다. 종이잡지지만 오프라인에만 머물지 않는다. 뉴스레터 구독자 수는 5200명에 이르고, 공개 세미나는 인스타그램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100석짜리 강의에 200명이 몰렸다. 잡지 디자인 역시 ‘젊다’. 크기는 127×182㎜에 분량은 200쪽 안팎. 스마트폰을 쥐던 손에 착 감긴다. 책등이 형광색으로 빛나던 1호에 이어 2호 표지는 PC통신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앞서 민음사는 문학 격월간지 ‘릿터’, 비평 무크지 ‘크릿터’를 연이어 선보이며 ‘신문예지’ 시대를 열었다. 신새벽 편집자는 “기존 잡지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비문학 쪽에서도 젊은층을 타깃으로 한 잡지를 만들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면서 “인문시장이 기존에는 40~50대 남성 독자가 많다는 예측들이 있었는데 ‘한편’은 30대 초반 제 또래들이 친숙하고 재밌게 볼 수 있는 잡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상당수 필자들이 교수가 아닌 비정규 연구자들인 것도 눈에 띈다. 신 편집자는 “자리를 잡지 못한 연구자들은 청탁이 잘 안 들어오고 여유 있게 글 쓸 시간도 부족하다보니 기회를 나누려 노력했다”면서 “글 내용도 위에서 아래를 보며 대상화하는 시선이 아닌 청년 당사자들이 자기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책임을 지자는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2015년 ‘문학권력’ 논쟁이 문단을 휩쓴 뒤 출판사들은 저마다 쇄신에 나섰다. 창비는 ‘창작과비평’과는 별개로 젊은 문예지를 표방하며 2017년 ‘문학3’을 출범시켰다. 종이잡지와 웹사이트, 현장활동을 함께하는 문학플랫폼이다. 지난 15일 출간된 ‘문학3’ 11호는 연분홍 바탕에 강아지 모형이 표지를 장식했다. ‘동물과 인간중심주의’라는 묵직한 주제의 글들과 함께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학생 입학 포기, 폐쇄병동의 코로나19 집단감염 등 현장의 이야기들을 엮었다.

‘문학3’ 측은 e메일 답변을 통해 “ ‘문학3’ 역시 문학·사회 비평을 다룬다는 점에서 ‘창작과비평’과 큰 틀에선 비슷하지만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 젊은 필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기존 문예지 바깥의 움직임을 담아내려 하고 있다”면서 “특히 집담회 등 독자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문학의 현장화를 구현하려 노력한다”고 밝혔다. ‘문학3’도 확인된 구독자 중 1980~1990년대생이 66%에 이른다. ‘문학3’ 측은 “문학 독자이면서 기존 문예지에 큰 진입 장벽을 느꼈던 사람들이 젊은 잡지를 통해 좀 더 편하게 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들 ‘젊은 잡지’는 특정 독자들을 사로잡는 독특한 관점이나 심층적인 내용을 무기로 한다. 이미 은행나무의 격월간 ‘악스트’는 오롯이 소설에 집중하며 문단의 화제를 모았고, 문학동네는 아예 종이 문예지를 벗어나 지난 3월 웹진 ‘주간 문학동네’를 펴내고 인기 작가들의 연재를 시작했다. 이음의 과학잡지 ‘에피’, 사진잡지 ‘보스토크’, 철학잡지 ‘뉴필로소퍼’, 파충류잡지 ‘Reptile(렙타일)’ 등도 눈길을 끌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 잡지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잡지산업 전체 매출이 2014년 1조3754억원에서 2017년 1조354억원으로 24.7% 줄었다. 반면 ‘잡지’로 등록된 정기간행물은 같은 기간 4838종에서 5107종으로 늘었으며, 정기구독자가 있는 잡지 비율은 76.2%에서 88.7%로 12.5%포인트 증가했다. 판매 수입 비중 역시 38.5%에서 42.4%로 3.9%포인트 상승했다.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도 색깔 있는 잡지들은 활로를 찾고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민음사 ‘한편’의 경우도 원고료 정도만 들여 자체 제작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신새벽 편집자는 “한국 사회에서 잡지는 지식공동체 담론을 형성하고 확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면서 “출판시장이 어렵다고 하지만 세밀한 타기팅을 통해 핵심 독자층에 가닿으면 여전히 종이책도 반응이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