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오월 길'을 내고, '오월 서가'를 차린 이유

[망각에 맞선 광주시민들의 기억 투쟁 ②]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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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매일 5시 18분... 알람이 울립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에서 이어집니다.)
  
코로나의 확산으로 지금이야 발길이 뚝 끊겼지만 스페인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함께 유럽의 내로라하는 관광 대국이다. 사람들이 스페인을 찾는 이유는 만 가지도 넘을 테지만, 최근 이곳을 첫손가락에 꼽는 이들이 많다. 바로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 Tiago).'

우리말로 번역하면 '산티아고 길', 곧 성 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길이라는 뜻이다. 험준한 피레네산맥을 넘어 장장 800km에 이르는 이 길을 걷는 여행자들이 한 해 수십만 명에 이를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어느덧 세계 모든 도보 여행자들의 성지로 우뚝하다.

우리나라엔 '산티아고 길'을 벤치마킹한 제주도 올레길이 유명하다. <오마이뉴스> 전 편집국장을 지낸 사회운동가 서명숙 선생이 고향인 제주도에 개척한 도보 여행길이다. 올레란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인데, 이젠 전국에서 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표준어'가 됐다.

광주에는 '오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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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 길" 표식 스페인에 "산티아고 길"이, 미국 보스턴에 "자유의 길"이, 제주도에 "올레길"이 있다면, 광주에는 "오월 길"이 있다. 5.18 사적지 답사가 곧 "오월 길"을 걷는 것이다. ⓒ 서부원

이곳 광주에도 '오월 길'이라는 순례길이 있다. 올레길을 본떠 5.18 민주화운동 30주년이었던 지난 2010년에 조성한 것이다. 굳이 차이라면, 올레길이 막개발의 광풍에 훼손되어가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켜내자는 속뜻을 담고 있다면, '오월 길'은 5.18을 기억하자는 취지다.

광주의 '오월 길'은 '산티아고 길'이나 제주도 올레길처럼 구간별로 이어진 한 갈래 길이 아니다. 각각의 주제별로 그물망처럼 뻗어 있는데, 길에서 만나는 사적지마다 다양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5.18의 위상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5.18의 시작에서 최후까지 역사의 현장을 잇는 '오월 인권 길', 항쟁을 주도한 이름 없는 시민들을 기리기 위한 '오월 민중 길', 5.18의 역사적 연원을 찾아가는 '오월 의향 길', 5.18을 계승하려는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을 담은 '오월 예술 길', 광주를 넘어 남도의 곳곳에 전파된 5.18의 자취를 찾아가는 '오월 남도 길'까지, 총 다섯 갈래다.

네 갈래는 광주 시내에 있고, 나머지 한 갈래는 광주에서 전남 목포, 해남 등지를 잇고 있다. 당시 가까스로 광주를 탈출한 시민들이 광주의 참상을 전하며 해당 지역에서 자발적인 집회를 열었다. 5.18이 남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음을 '오월 길'이 보여주고 있다.

가이드 맵 북(5.18 Road)은 구비되어 있으나, 도보 여행길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한 구석이 많다. 우선 사적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 걸어서 둘러보기가 만만치 않다. 더욱이 지난 40년 동안 인구 14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변모하면서 5.18 당시의 현장이 크게 훼손됐다.

사적지 대부분이 도심의 간선도로변이어서 걷기보다 차라리 자동차를 이용해서 찾아가는 편이 더 수월하다. '오월 길'을 알리는 표식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지만, 신호등과 상가의 간판에 가려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그마저 표식의 수도 적고 도심 주변에서만 만날 수 있다.

'오월 길'을 따라 걷기 위해 굳이 표식을 찾을 필요는 없다. 5.18 사적지 답사가 곧 '오월 길' 걷기다. 5.18을 기억하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과 광주를 찾는 외지인들이 시나브로 늘어난다면, 산티아고 길이나 올레길 부럽지 않은 도보 여행자들의 성지로 발돋움할 수 있지 않을까.

녹두서점에 담긴 열사의 유언
  
여러 갈래 '오월 길'이 지나는 5.18 사적지 중에 개인적으로 자주 찾아가는 곳이 있다. '오월 인권 길'과 '오월 민중 길'이 교차하는 녹두서점 터다. 40년이 지난 지금 옛 서점 건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이곳이 사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만 도로변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녹두서점은 엄혹했던 유신 시절, 청년 학생들이 모여 시국 토론을 벌였던 민주주의의 학습장이었다. 5.18 기간에는 '투사회보'를 발간하며 언론사 역할을 대신했다. MBC나 KBS 등 당시 신군부의 충견 노릇을 한 관제 언론에 대항하여 결연히 맞서 싸운 역사의 현장이다.

그곳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투항 방침에 맞서 시민군 항쟁위원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신군부에 투항하는 것은 폭도임을 자인하는 꼴이며 지금껏 계엄군의 총칼에 스러진 수많은 희생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고작 서른. 당시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가 유언처럼 남긴 이 말이 가슴을 친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이곳 '오월 길' 녹두서점 터를 찾는 이유다.

"비록 이 밤을 넘기지 못하고 우리는 저들의 총칼에 죽게 될 테지만, 역사는 오늘 패배한 우리를 영원히 승리자로 기억할 것이다."
  
'역사교육의 장'이 될 전일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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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일 빌딩 내 전시관 내부 전일 빌딩은 가까스로 철거 위기를 넘기고 리모델링을 마친 뒤 5.18 40주년에 맞춰 재개관했다. 당시의 참상을 목격한 "오월의 산 증인"으로, 사적 제28호로 지정되었다. ⓒ 서부원

 
'오월의 산증인' 전일 빌딩이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 또한 5.18을 기억하기 위한 시민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와 <택시운전사> 등에 등장하는 계엄군의 조준 사격이 행해진 곳이 이 건물 앞이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애국가와 함께 시작된 10분간의 발포로 이곳에서 학살당한 시민들만 최소 56명에 이른다.

전일 빌딩은 그 참혹한 광경을 묵묵히 지켜봤다. 4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주변 건물 중에 온전히 남은 거라곤 이것뿐이다. 당시 도청소재지인 광주를 포함해 전남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어서, 전남의 전, 제일의 일을 써서 전일 빌딩이라고 명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워낙 낡고 오래된 건물이라 수년 전부터 철거 여론이 비등했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알짜배기 땅이어서인지 여러 건설사가 관심을 보였고 지방정부에서도 다양한 구상이 오갔다. 도심공동화를 막기 위한 주상복합아파트를 짓자는 주장부터, 아시아문화전당과 연계해 공원과 주차장을 조성하자는 제안까지 백가쟁명의 토론이 이어졌다.

건설 자본의 먹잇감이 될 뻔했던 순간, 5.18 유가족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역사의 흔적을 지우려는 처사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철거와 신축 대신 사적지로 지정해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때마침 건물 내에 숱한 헬기 탄흔이 발견돼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재개발 주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만약 일사천리로 재개발이 결정되고 진행되었다면 5.18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 헬기 탄흔은 아예 사라졌을 것이다. 전일 빌딩의 보존은 역사의 현장이 사라지면 기억도 지워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시민들이 새삼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살아남은 전일 빌딩은 곧장 5.18 사적지 제28호로 지정되었다.

리모델링을 끝내고 40주년 기념일에 맞춰 '전일 빌딩 245'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했다. 외양은 5.18 당시의 모습 그대로이고, 실내는 기억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245개의 헬기 탄흔이 남아있는 공간은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준비를 마쳤다.

학살의 책임자는 여전히 발뺌하고 있지만,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며 5.18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이어지는 한 그들의 만행을 법적으로 단죄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독일 정부가 나치 부역자를 끝까지 추적해 처벌하듯,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학살자에게 공소시효란 있을 수 없다. 그래야만 후세가 역사를 두려워하게 된다.

알베르 카뮈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일"이라고 갈파했다. 시민들 역시 학살 책임자를 끝까지 단죄하기 위해서라도 전일 빌딩을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억을 위한 장소가 사라지는 것 또한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일'이라는 거다.

'오월 서가'를 연 특별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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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 서가 "숨" 독서실을 갖추고 지역 주민의 사랑방을 겸하고 있는 "오월 서가" 중의 한 곳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 서부원

 
한편 별도의 부스를 마련해 5.18 관련 도서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오월 서가(書架)'도 주목할 만하다. 인터넷과 대형 서점이 도서 시장을 석권하면서 폐업의 위기에 몰린 시내의 작은 서점들을 5.18의 기억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프로젝트다. 이는 나눔과 연대라는 5.18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오월 서가' 중에는 독서실을 갖추고 지역 주민의 사랑방 역할을 겸한 곳도 있고, 북 카페 형태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그래선지 서점이 아니라 언뜻 주민자치센터나 가정집 같은 느낌이 난다. 동네 서점도 살리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5.18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윈윈 전략'인 셈이다.

책도 읽고, 차도 마시고, 토론도 하며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공간으로 가꾼다는 구상이다. 5.18 당시 녹두서점이 그러했듯, 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도 공동체의 중심으로서 서점의 역할은 계속될 것이다.

듣자니까, 향후 '오월 서가'들을 잇는 순례길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한다. 시민들이 세대를 넘어 5.18을 기억하고 정신을 공유하는 교두보로 삼는다는 복안이다. 명실공히 현대적 감성의 또 하나의 '사적지'로서, 5.18이 젊은 세대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오월 길'을 내고, 전일 빌딩을 지켜내며, '오월 서가'를 연 이유는 오직 하나 5.18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이는 당장 천신만고 끝에 출범한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활동에 힘을 보태는 일이기도 하다. 진실을 외면한 기억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민들은 잘 알고 있다.
  
진상규명을 통해 책임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며, 합당한 보상을 하고, 기념사업을 통해 영원히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5.18은 우리에게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했다. 이는 우리가 삼시세끼 밥 챙겨 먹듯 매 순간 떠올려야 할 금언이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릴 잊지 말아 주십시오."

계엄군에 의해 도청이 함락되던 27일 새벽, 숭의여전에 다니던 박영순은 시내를 돌며 마지막 가두방송을 했다. 당시 시민들은 두려움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눈물을 삼키며 굳은 다짐을 했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로서,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이날을 영원히 기억하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