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탑에서 사는 그에게 건넨 '정신과 약'
[동네의사와 기본소득 ⑪] 모두에게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하)
by 정상훈(sanghun0416)'동네의사의 기본소득'이 매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동네의사'는 과거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했고, 한국 최초의 에볼라 의사이기도 합니다. '동네의사'가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풀어봅니다. [편집자말] |
누군가는 올라가야 했다
벚꽃이 몽롱할 정도로 흐드러지게 핀 지난 3월 봄날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IT 빌딩들 사이를 지나 도착한 곳은 한 공장이었다. 봄볕이 너무 좋아서였을까? 공장 담벼락에 붙어 있는 현수막과 꿈틀거리는 글귀들은 왠지 모르게 꿈같았다. 그 너머로 비닐을 칭칭 휘감은 철탑이 발뒤꿈치를 들어 머리를 내민 것처럼 서있었다. 두 사람이 바로 그 위에 있었다.
두 명의 노동자는 120일 넘게 그 철탑에서 농성 중이라고 했다. 노동조합은 그들의 건강 상태를 살펴줄 의사를 찾았고, 필자가 응했다. 방책으로 막아놓은 정문을 지나자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합원들이 맞아주었다. 간단하게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노동조합은 이미 20년 가까이 회사와 싸우고 있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이 공장에도 노동조합이 생겼다. 그런데 1998년 IMF가 터지자 '정리해고'가 가능해졌다. 회사는 '경영상의 이유로' 노동자들을 대거 해고했다. 현장과 법원에서 몇 년 동안 끈질기게 싸웠고 마침내 '부당 해고'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회사도 포기하지 않았다. 회사는 별도 법인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을 갈라놓거나 공장 일부를 해외로 이전했다. 또 조합원들을 생산라인에 따로 배치해서 CCTV로 감시하고 도청까지 했다.
이렇게 시달린 조합원들은 '우울증을 수반한 만성 적응장애'라는 산업재해 판정을 받았다. 끔찍하게 길었던 투쟁은 그렇게 잠잠해지나 싶었다. 그런데 이제 회사는 공장 대지를 매각하려고 했다. 회사는 단순한 이전이지, 생산라인을 폐쇄할 뜻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숱하게 당한 노동자들,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조합원들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국 누군가 철탑에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철탑으로 안내하던 조합원이 설명을 마치며 덧붙였다.
"도대체 누가 저런 곳에 올라가고 싶겠어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공황장애와 우울증
필자는 어기적어기적 철탑을 기어 올라갔다. 오래 씻지 못해 꾀죄죄한 얼굴에 두꺼운 패딩을 입은 두 사람이 좁은 철탑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봄볕을 즐기며 잠깐 걷기엔 따뜻하지만, 밖에 오래 있으면 한기가 드는 3월이었다. 휭휭 부는 바람 때문에 철탑 위에 쳐놓은 천막이 사납게 흔들렸다.
필자는 가져간 청진기, 체온계, 혈압계 등으로 간단한 진찰을 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마음이 쓰였다. 보통 '투쟁하는 철의 노동자'라면, 필자 같은 외부인에게 씩씩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노동자의 얼굴에는 의지로 어찌 할 수 없는 어두움과 피로감이 드러나 있었다.
필자는 그 노동자와 천막 안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최근 잠을 잘 못자고 입맛도 없다고 했다. 불면증은 다른 마음 건강 문제의 신호인 경우가 흔하다. 필자가 물었다.
"이렇게 오래 철탑에서 농성을 하니까 많이 힘드시겠어요?"
"사실 요즘 이러다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고는 해요. 그럴 때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쉬기도 힘들어요."
"조합원들에게 미안해서 힘들다는 표현도 잘 못하시겠네요?"
"그렇죠. 어떨 때는 제가 철탑에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렵습니다."
철탑에서 서둘러 내려온 필자는 가깝게 알고 지내는 정신과 의사와 통화했다. 그 노동자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정신과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을 가지고 일주일 후 공장 철탑을 다시 방문했다.
"지금 철탑에서 내려가서 정신과 치료를 받으셔야 한다고 권해 드립니다."
그 노동자의 답을 기다리는 몇 초가 무척 길게 느껴졌다. 아마 답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내려갈 수 없으며, 좀더 버텨보겠다고 답했다. 필자는 준비해간 약을 건네주고 철탑을 내려왔다.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
우리는 수없이 목격해왔다. 노동자들은 단식을 하거나 철탑이나 광고탑에 올라갔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일터에서 일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임금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할 때도, 가장 위험한 방법, 바로 목숨 내놓기를 각오해야 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먼저 노동조합 조직률을 살펴보아야 한다.
201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노동조합 조직률은 10.7%인데, 이는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프랑스는 노동조합 조직률이 11.0%로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단체협약 적용률이 98%로 높다(우리나라는 12%). 그래서 산별노조 단위로 단체협약을 교섭하기 때문에, 낮은 노동조합 조직률을 보완할 수 있다.
치명적 산업재해 수가 우리나라의 1/7에 불과한 스웨덴을 기억하는가? <'가장 안전한 나라' 한국의 속사정>에서 언급했듯이 스웨덴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무려 66%에 달한다. 역시 우리나라보다 7배 가까이 높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들에게는 단결이 거의 유일한 무기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90%는 노동조합의 밖에 있다.
기본소득이 노동조합의 힘을 약하게 만든다?
기본소득에 대한 주요한 반론 중 하나는 뜻밖에도 노동조합에서 나오고 있다. 기본소득이 노동조합의 힘을 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받은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임금을 삭감해도 투쟁하지 않을 것이라고, 노동조합은 우려한다. 하지만 줄어든 임금을 개별 노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은 가정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다.
노동소득분배율은 국민소득 중 노동자의 몫을 가리킨다. 우리나라 노동소득분배율은 1998년 이후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그래서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반대로 커지고 있다.
자신의 몫이 줄어드는데도 노동자들은 왜 노동조합 가입을 주저할까? 먹고 살기 힘들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하거나 파업을 해도 기본소득 덕에 '밥 굶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상상해 보자. 무엇이 노동자를 단결하게 하는가? 그것은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희망'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상훈씨는 기본소득당 당원입니다. 기본소득당은 평균나이 27세의 당원들이 만든 정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