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공백 외면한 책임 소재 따지기 언제까지
돌봄이 필요한 모든 아동에게 '보편적 돌봄' 제공해야
by 이민희(xfile3408)
교육부가 방과후돌봄 법제화 추진을 사흘만에 중단키로 했다. 교원단체들의 거센 반발 때문이다. 법제도적 근거없이 '업무 지침'으로 유지해 온 방과후돌봄은 불안정하고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밖에 없다. '학교냐 지역이냐'의 책임 소재 공방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이 혼란스럽고 무책임한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지켜보는 학부모의 심정은 답답하기만 하다.
교육부는 지난 5월 19일, 돌봄교실을 학교 고유 사무에 포함시키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교육부 공고 제 2020-178호)했다. 교육부는 "학교별 특성에 맞는 다양하고 특색있는 방과후 프로그램 및 돌봄교실 운영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방과후학교 운영을 도모하고자 한다"고 개정 이유를 밝혔다.
교원단체들은 즉각 반발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학교는 보육기관이 아닌 교육기관이므로 교사들이 교육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방과후돌봄 업무는 지역으로 이관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도 '보육 영역은 지자체가 운영을 맡아야 한다'며 교육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전북교사노조는 '돌봄교실 법제화를 추진한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교육철학이 부족하므로 직에서 물러나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교육공무직은 다른 각도에서 교육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학비노조)은 '교육부가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하여 초등돌봄교실과 방과후학교의 법적근거를 마련한 것은 코로나 시대에 최소한의 조치였다'며 '초등돌봄교실의 관리자 역할을 하는 교사들의 업무 가중 우려와 지자체 이관 주장에 굴복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는 '교육당국은 당사자들을 배제한 채 경거망동을 벌일 게 아니라, 오해와 억측이 없도록 관계자들과 직접 협의를 통해 근거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방과후돌봄 책임 문제를 둘러싼 교육계 안팎의 혼란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17년에도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초등돌봄교실은 보육의 영역이라며 지자체 이관을 제안했으나, '전국교육공무직본부'는 돌봄교실의 질을 떨어뜨리고 돌봄전담사들의 고용불안을 야기할 것이라며 반대했었다.
방과후돌봄은 교육주체들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데다, 보건복지부(지역아동센터), 여성가족부(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 등 돌봄의 공급체계가 다원화되어 있어 타부처와의 조율도 필요한 복잡한 사안이다. 따라서 충분한 소통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법제도적 정비를 해야 한다. 그걸 모를 리 없는 교육부가 왜 이렇게 졸속으로 일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불신만 더 증폭한 꼴이 되었다.
'로또' 방과후
나는 초등학생 두 명, 유치원 생 한 명을 둔 학부모다. 워킹맘이기 때문에 나는 매년 학교 방과후돌봄을 신청하고 있다. 다행히 시골의 작은 학교를 보낸 덕분에 특별한 제약없이 방과후돌봄을 이용할 수 있고 큰 곤란함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실제로 돌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가정의 육아 부담을 경감하는 돌봄서비스가 여성의 경제활동과 사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작지 않다. '합계출산율'이 0.98(2018년 기준)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방과후돌봄은 저출산 시대에 높아진 공적 돌봄의 필요성을 충족하고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만약 내 아이들이 도시의 큰 학교를 다녔다면 방과후돌봄을 이용하기 위해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했을 것이다. 추첨제로 대상자를 선발하는 방과후돌봄에 탈락하면 돌봄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육아를 위해 여성이 일을 포기하거나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를 빗대어 나온 말이 '로또 방과후' '초등 돌봄 절벽' '학원 뺑뺑이' 같은 것들이다.
돌봄의 수요는 높으나 공급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어린이집, 유치원에서의 돌봄이 가능했으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수업 시간이 짧아져 일찍 귀가를 해야 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은 초등학교 입학 이후 돌봄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초등 돌봄 서비스의 지속적인 확대를 추진해왔으나 여전히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풀어야 할 논제들
필자가 보기에 복잡하게 얽힌 방과후돌봄 문제 해결에서 토론이 필요한 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방과후돌봄의 영역을 '교육'과 '보육' 중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있을까? 교육이라고 보면 '학교'의 업무가 되고, 보육이라고 보면 '지자체'의 업무가 되는 것인가?
사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교육 안에는 보육의 기능이 있고, 보육 안에도 교육의 기능이 있다. 분리가 아니라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대립적 논점이 아닌 문제를 놓고 날을 세우며 소모적인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방과후돌봄은 학교교육체계가 규정하고 있는 정규 수업 시간 이외의 시간에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문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학교'로 표준화, 일원화, 규격화 되었고 가정과 마을은 점점 그 교육적 기능을 상실해 갔다. 유럽의 복지선진국처럼 무상교육, 무상보육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의 부모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부모가 일에 매달릴수록 아이들의 돌봄공백은 커지고 아이들을 위한다는 일이 결국은 아이들을 망치는 악순환 속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방과후돌봄은 (그것을 교육이라고 부르든, 보육이라고 부르든) 학교 정규 수업 시간 이후에도 돌봄의 공백없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까에 대한 '사회적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누가 서비스를 공급할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하기 전에 아이들의 총체적인 삶에 먼저 주목했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행복한 배움과 성장을 위해 방과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시민'으로 키워야 할 교육 현장에서조차 '협력'을 이룰 수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모순 아닐까?
둘째, 방과후돌봄 책임 소재가 '학교냐 지자체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쟁점이다. 유독 한국에서만 이런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은 일반자치와 교육자치가 분리된 세계에서 몇 안되는 국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광역시도 교육감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면서 교육자치가 본격화되었다. 교육자치는 교육이라는 국가공공재를 어떤 이념과 철학에 기초해 운영하고 공급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지방분권 강화라는 대전제에 따라 중앙정부(교육부)의 교육 권한을 시도 단위에 이양하여 '지방교육자치'를 실현한다는 취지다.
교육자치를 가능하게 하려면 제도와 행정에서 분권적 개편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중앙과 지역 간의 분권과 자치 못지 않게 지역에서 지자체와 시도교육청 간의 분권 자치도 중요한 문제다. 일반자치와 교육자치의 분리 구조 안에서 교육자치 실현은 풀기 어려운 방정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의 법제도 체계에서 칸막이 구조를 넘어서 의제를 중심으로 어떻게 협력하고 상생할 것인가에 고민을 집중해야 한다. 서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협치'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되는 것이다.
일반자치와 교육자치가 분리된 대단히 특수한 거버넌스적 환경에서 지자체와 학교의 관계를 잘 설정하고 협력을 상설화할 수 있는 체계를 세워야 한다. 방과후돌봄은 학교가 일방적으로 떠안을 수 있는 것도, 학교에서 전부 빼내 지자체만 담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방과후돌봄과 같은 중요한 교육적 의제를 지역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자치적으로' 해결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적 현실에 맞는 학교와 지역의 협력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지역사회기반 돌봄서비스 체계 구축으로 돌봄의 공적 인프라를 확장해야 한다.
2018년 4월 정부는 돌봄이 필요한 아동에게 다양한 돌봄서비스를 확대 제공하기 위해 관계부처 합동으로 '온종일 돌봄 구축 운영계획'을 마련했다. 교육부는 학교 돌봄과 마을 돌봄을 각각 10만 명씩 확대하여 2022년까지 53만 명에게 초등 돌봄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한 전략으로 공공 서비스 인프라 확충을 위한 마을과 학교의 연계 협력 체계 구축을 제시했다.
방과후돌봄을 위해서는 돌봄 서비스 제공을 위한 공간, 인력, 프로그램(컨텐츠), 예산이 필요하다. 이 네 가지가 갖추어져야 제대로 된 방과후돌봄이 가능해진다. 정부는 이 문제를 마을과 학교의 협력을 통해 풀겠다는 것이다.
공간 문제는 학교 시설을 활용하면 된다. '마을 돌봄'이 충분히 가능할 만큼의 공간 인프라를 갖춘 지역이 얼마나 되겠는가. 학교는 수업 이외에는 엄연히 활용가능한 유휴 공간이고 공공의 재산이다. 돌봄전담사, 방과후교사와 같이 방과후돌봄을 담당하는 인력의 지위와 처우가 낮은 문제는 서비스의 질적 수준과 직결된다. 필요한만큼 충분하게 양질의 방과후돌봄 서비스를 확충하기 위해서라도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합당한 대우가 필요하다.
정규 수업 이외의 시간에 제공되는 방과후돌봄은 대부분 '경험 교육' 위주로 진행될 것이다. 학교 안팎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 교육은 아이의 성장 과정을 더 풍성하게 해 준다. 의미있으며 활발한 경험 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학교와 지역이 손을 잡아야 한다. 이는 학교 담장을 넘어 지역사회로의 학습 생태계를 확장하자는 마을교육공동체의 필요성과도 맞닿아있다. 이러한 교육이 충분하게 활성화된다면 아이들을 '학원 뺑뺑이' 돌리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지역사회에 기반한 방과후돌봄체계 구축을 위해서는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유능한 해결책, 정책의 취지와 방향에 걸맞는 실행대책, 지역적 현황이 반영된 실질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
넷째, '아동권' 측면에서 방과후돌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지금 논의 중인 방과후돌봄 체계 구축은 대부분의 내용이 '서비스 공급'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얼마나 많은 서비스를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하는 부분이다. 정작 교육의 주체인 아이들의 삶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되어 있다.
아이들은 정말로 정규 수업 이외에 또 다른 교육을 받기를 원할까? 방과후돌봄이 진짜 아이의 선택일까? 하루 중 절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교육 받는데 할애중인 아이들에게 방과후돌봄보다는 '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들은 방과후돌봄 체계 구축 논의 어느 대목에서 풀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르면 이 세상 어린이라면 누구나 '생존, 보호, 발달, 참여'의 권리를 마땅히 누려야 한다. '생존의 권리'란 안전한 주거, 생활, 영양, 보건서비스 받을 권리 등 기본적인 삶을 누리는데 필요한 권리다. '보호의 권리'란 모든 형태의 학대와 방임, 차별, 폭력 등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다. '발달의 권리'는 교육받을 권리, 여가를 즐길 권리, 문화생활을 하고 정보를 얻을 권리, 생각과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 등을 규정한다. '참여의 권리'란 표현의 자유, 양심과 종교의 자유 등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일에 대해 의견을 말하고 존중받을 권리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교육이, 돌봄이, 복지가 아이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방과후돌봄이 '서비스 제공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로만 논의가 수렴된다면 상상력은 박제되고 내용은 협소해질 것이다.
공공성과 보편성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히고 사안이 복잡해 보일수록 문제를 단순화시켜야 답이 보인다. 단순화시킨다는 것은 문제를 축소한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나는 방과후돌봄 문제를 '공공성'과 '보편성'의 원칙에 기초해 풀어야 한다고 믿는다. 돌봄이 필요한 아동 모두에게 국가가 책임적으로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 양질의 충분한 돌봄이 필요한 아동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원칙하에 중앙과 지방의 권한과 책임의 배분, 학교와 지역사회의 권한과 책임의 배분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결정되고 집행되어야 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조안 C. 트론토는 책 <돌봄 민주주의>에서 이렇게 썼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존재한다. 돌봄을 위한 충분한 자원을 제공하고 우리의 돌봄 책임을 재검토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데 다시 한번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뢰의 수준을 높일 수 있으며 불평등의 정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며 모든 이를 위한 진정한 자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써 보고 싶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제대로 된 '국가'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