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미의 '찬찬히 본 세계']앙골라 참전병이 석유회사를? 베네수엘라의 수상한 러시아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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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에게 업무 보고를 하는 이고르 세친 로스네프트 CEO. |로스네프트 홈페이지

러시아 정부는 지난 3월28일 로스자루베네즈네프트라는 새로운 국영 에너지 회사를 설립했다.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이 회사는 석유와 가스의 생산과 운송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회사로, 앙골라 내전 참전 군인 출신인 니콜라이 르이브축이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이 회사가 설립된 날 러시아의 거대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는 베네수엘라에서 석유 사업을 중단하고, 자산을 매각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 2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정권이 부정선거를 통해 집권한 불법 독재정권이라며,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 PDVSA와 거래하는 로스네프트의 자회사 로스네프트 트레이딩에 제재를 가했다. 결국 로스네프트는 베네수엘라 석유 사업에 손을 뗄 테니, 미국 측에 제재를 풀어달라고 한 것이다. 로스네프트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스위스 글렌코어나 카타르 투자청 등 투자자들의 눈치를 본 결과이기도 했다. 로스네프트는 베네수엘라 사업 자산을 신생 회사인 로스자루베네즈네프트에 매각했다.

로스네프트의 베네수엘라 철수 결정은 미국의 ‘압박’이 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베네수엘라 석유 시장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18일(현지시간) 레온 아론 미국기업연구소 러시아 연구원은 미 의회전문매체 더힐에 쓴 기고에서 “베네수엘라가 연료난(휘발유 부족)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중요한 생명줄로 부상하고 있다”고 썼다. 러시아의 신생 에너지기업 로스자루베네즈네프트가 미국의 제재를 우회해 베네수엘라 석유 수출을 맡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아론 연구원은 “일단 시장 상황이 허락되면 최상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로스네프트의 직원 상당수가 이미 로스자루베네즈네프트로 옮겨 갔다”고 했다. 그는 “미국이 러시아 기업 제재를 통해 베네수엘라를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는 시기상조였다”면서 “러시아는 단지 추가 제재를 피하고 싶을 뿐이지 마두로 정권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고 했다.

로스자루베네즈네프트는 신생 회사인 만큼 미국이 추가 제재 리스트에 올릴 때까지, 미국의 제재를 피할 수 있게 됐다. 외교 전문가들은 신생 회사의 CEO인 르이브축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40억달러(약 4조9700억원) 규모의 회사의 관리자로 단번에 이름을 알렸는데, 그 이전 석유 산업에 종사한 이력은 없다. 르이브축은 1980년대 앙골라 내전 당시 옛 소련의 군인으로서 쿠바의 군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로스네프트의 현 CEO인 이고르 세친 또한 앙골라 내전 참전 군인이다.

캔다스 론데우스 전쟁의미래센터의 선임 연구원은 지난달 3일 국제관계 전문 온라인 매체인 월드폴리틱리뷰에 ‘로스자루베네즈네프트 비즈니스 모델’, 즉 ‘군사 기반의 사업’이 푸틴 대통령의 오랜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는 앞서 아프리카나 시리아에서도 같은 전략을 썼다는 것이다. 참전 군인을 국영 기업 경영진에 앉힌 뒤 해외에서 사업 운영 및 확장하는 식이다. 론데우스 연구원은 현재 베네수엘라에서 쿠바 정보 당국의 역할이 큰 상황에서, 르이브축이 쿠바 군부 인맥 등을 통해 현지 정보 입수는 물론 사업 추진을 위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