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호 비망록, 한명숙 재판부는 이렇게 봤다
[검증] 검찰은 '근거 없다'고 법원이 판단했다 주장했지만... 1심 판단은 명백히 달랐다
by 박소희(sost)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게 불법정치자금을 줬다는 진술을 번복했다가 위증죄 재판까지 받았던 고 한만호씨가 약 10년 전 남긴 비망록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한쪽에서는 '한명숙 사건의 진실을 보여준다'며 곧 출범하는 공수처의 수사 대상으로까지 거론한다. 반면 검찰은 이미 법원에서 허위로 판명 난 자료라고 반박한다.
어느 쪽 말이 진실일까? 정말 법원은 이미 '한만호 비망록'을 허위라고 판단했을까?
지난 20일 한 전 총리 수사팀은 "한만호 전 사장은 구치소 수감 중 노트에 '참회록, 변호인 접견노트, 참고노트, 메모노트' 등의 제목을 붙인 후 검찰 진술을 번복하고 법정에서 허위 증언을 하려는 계획, 다수의 허위 사실을 기재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1심부터 3심까지 매번 이 비망록을 증거로 제출했고, 법원이 결국 유죄판결을 확정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가 한씨의 비망록이 아닌 '한명숙 전 총리에게 돈을 줬다'는 그의 검찰 진술을 믿었다는 뜻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판단이 다 끝난 사안을 다시 끄집어내 정치공세를 펴는 셈이 된다.
하지만 실제 판결문에 담긴 한만호 비망록 관련 내용은 검찰 설명과 미묘하게 달랐다. 1심부터 3심까지 검찰이 비망록을 증거로 제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1심 판결문에 등장하는 '한만호 비망록'
2011년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재판장 김우진, 판사 김기수·김대권)는 한 전 총리에게 전부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의 핵심 증거, 한만호씨의 말 때문이었다. 한씨는 법정에서 "한 전 총리에게 어떠한 정치자금도 제공한 사실이 없다, (9억 원을 줬다는) 제 검찰 진술은 조작해낸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너무도 판이한 두 개의 진술(검찰에서의 진술, 법정에서의 진술). 재판부는 모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명숙 전 총리의 공소사실은 한만호씨가 2007년 3월말~4월초, 4월말~5월초, 8월말~9월초에 돈을 줄 때마다 한 전 총리와 직접 통화했다고 구성됐다. 하지만 한씨 휴대폰에 한 전 총리 연락처가 입력된 날짜는 2007년 8월 21일이었다. 검찰은 차명폰 등 여러 가지 가설을 제시했지만, 재판부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봤다. 이 대목에서 한만호 비망록이 등장한다.
한만호는 2010년 1월 4일 제3회 공판기일 변호인의 반대신문과정에서 피고인(한명숙)의 변호인이 휴대전화번호 저장일과 관련된 이와 같은 모순점을 밝히자 2011년 1월 20일경 구치소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노트에 "휴대전화 입력일자 밝혀지자 저의 진술 번복 행동이 정말이지 천만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무슨 망신에 어찌 하늘로 머리를 들 수 있었겠나. 참 잘했다. 내가 옳았다. 행복할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입력일자 알았으면 검찰에서의 모든 진술이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기재했고, 모친이 증인으로 신청됐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노트에 "저는 부모님 건강이 무척 걱정이다. 살인이나 다름없다. 정 그러시면 어느 것도 부모님의 생명보다 우선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진술 다시 번복해드리겠습니다. 어찌 진술하면 되겠습니까. 휴대전화 입력일이 밝혀졌으니 검찰에서의 진술 내용 그대로 하면 안 될 것 아닙니까. 다시 구상하겠습니다. 전에는 1시간 걸렸는데 이번엔 해봤으니 30분이면 될 것입니다. 진술 내용 걱정되시면 적어주시든가요"라고 기재하기도 하였다. (1심 판결문 92쪽)
여기서 말하는 '노트'는 한만호씨의 <참고서Ⅲ>와 <변접(변호인 접견의 줄임말 - 기자 주) NOTE>다. 당시 검찰은 '한씨가 진술 번복 후 허위사실과 모순된 논리로 검찰을 공격하고 있다'며 그의 법정 증언을 믿기 어렵다고 볼 수 있는 자료로 이 노트들을 제출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검찰 진술을 후회하고, 마치 가짜로 진술을 만든 것처럼 서술한 비망록 내용을 콕 집어 언급했다. 한씨가 한 전 총리와 매번 휴대전화로 통화했다는 것 역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한만호 비망록은 검찰의 현재 주장과 달리 한 전 총리 무죄 판단의 근거 중 하나로 쓰였다.
2·3심 판결문에는 언급 자체가 없어
항소심(서울고법 형사6부, 재판장 정형식, 판사 김관용·윤정근)과 대법원 다수의견(양승태·권순일·김신·김창석·민일영·고영한·박상옥·조희대 대법관) 결론은 유죄였다. 하지만 판결문 어디에도 한만호 비망록 얘기는 없다. 상급심들은 비망록을 따로 언급하지 않는 대신 한씨의 검찰 진술을 믿을 수 있는 까닭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3억 원만 유죄라고 본 대법원 소수의견(이상훈·김소영·김용덕·박보영·이인복 대법관)에도 한만호 비망록 얘기는 없었다. 다만 이들은 한만호씨의 어떤 진술을 믿느냐를 떠나 항소심 재판부의 검증이 허술했다고 지적했다.
수사팀 관계자는 <오마이뉴스> 문의에 "(재판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며 "한만호씨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했으니까 (항소심과 대법원 판결문에서) 언급할 필요도 없던 것"이라고 답했다. 또 "한씨가 법정에서 검찰 진술이 다 허위라면서도 '(검찰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한 게 아니다, 한 총리에게도 죽을 죄를 지었지만, 수사 검사에게도 못할 짓을 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검찰 "언급할 필요도 없어"... 한명숙 전 총리는 '정중동'
한 전 총리는 한만호 비망록 보도나 검찰 반박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2017년 8월 23일 만기 출소 후 자신의 사건 관련 발언은 물론 공개활동을 꺼리고 있다.
다만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11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한 전 총리는 거듭 자신의 결백을 말했다. 측근 김현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기자들에게 "(한 전 총리가 권양숙 여사 주최 오찬에서) '제가 인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며 "그 마음은 곧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한만호 비망록 관련 추가 취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한 전 총리가) 그 내용을 보고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