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짜기 농촌의 인구증가, 그 속에 담긴 진실
[영풍과 환경오염 ⑥] 산채와 고랭지 채소의 고장, 석포
by 손영호(pianotuner)
경북 봉화군에서도 가장 험한 산악지대인 석포면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600여 년 전 나래기마을에 경주 김씨 40여 가구가 화전(火田)을 일구어 감자, 콩, 옥수수 등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석포리천에 위치한 나래기에는 현재 10여 가구가 고랭지 채소와 당귀를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석포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자 면 소재지가 있는 석포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도 알기는 어렵다. 봉화군 홈페이지에는 1800년대에 낙동강변 산중턱에 '둔지'라 불리는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산중턱에 위치한, 토지가 넓고 평평하여 그곳에 올라서면 낙동강물의 흐름이 보이고 뒷산은 누워있는 듯이 아늑하다. 1800년 초 마을을 이루어 농사를 짓기 시작할 때 비옥한 토지로 유명했고, 평평한 지대가 마을을 짊어지고 가는 듯한 든든함이 있다 하여 둔지라고 붙여졌다."
광산, 제련소가 들어서면서 석포면 새로 생겨
석포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깊숙한 벽지에 있어서 오랫동안 독립된 행정구역을 형성하지 못했다. 본래 안동군 소천면에 속해 있었던 석포는 1906년 봉화군 소천면에 편입되었다.
석포에서 면 소재지까지 거리가 멀어 주민 불편이 많아지자 1963년 석포 1·2리와 대현리, 승부리 등 4개 리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석포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석포리가 본래 큰 마을인 데다 1961년 영풍이 대현리에 연화광산을 개발하면서 인구가 증가한 것이 석포출장소의 설치 배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0년 석포의 낙동강변에 영풍 석포제련소 1공장과 동화지단(동화티타늄, 지금의 석포제련소 2공장에 위치)이 들어서면서 마을 규모는 더욱 커졌다. 1983년 석포출장소는 석포면으로 승격되었고, 석포면의 행정리는 석포 1·2·3·4리와 대현 1·2·3리, 승부리 등 8개로 늘어났다.
1993년 연화광산이 휴광에 들어가고 광산노동자가 빠져나가면서 대현리의 인구가 크게 줄었다. 2000년 대현 1·2·3리가 대현 1,2리로 통합 개편되었고, 현재 석포면에는 석포 1·2·3·4리, 대현 1·2리, 승부리 등 7개의 행정리와 21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으로 봉화 인구 감소
봉화는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데다 교통이 불편해 인적이 드문 오지였고 오랫동안 작은 고을이었다. 1907년에 발간된 장지연의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에 따르면 봉화의 가구는 818호였는데 전국에서 일곱 번째로 작은 것이었다.
봉화의 인구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증가하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다소 감소했고, 그 뒤 다시 증가하다 1960년대 말을 기점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 1930년 7만여 명이던 인구는 1968년 12만1천여 명으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그 뒤 계속 감소하였다. 2017년 봉화의 인구는 3만3천여 명으로 1968년의 28% 수준이다.
봉화의 세대수 변화를 살펴보면 2000년대 중반 이전에는 인구 변화 추이와 비슷하게 증가하다 감소했고 그 이후에는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세대수 증가는 귀농·귀촌 인구의 증가 등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세대별 인구는 1968년 5.7명에까지 이르렀다가 그 뒤 계속 감소하여 2017년에는 2.0명으로 줄어들었다.
1960년대 이후 봉화의 인구 감소는 우리나라 농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근대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는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나타났고 그로 인해 농촌에서는 공동화(空洞化)와 고령화 현상이 나타났다.
농촌공동화가 초래한 결과 중의 하나는 5일장의 변화이다. 석포리, 대현리, 승부리가 소천면에 속해 있었던 1970년대에는 소천면의 인구가 봉화면(지금의 봉화읍)의 인구보다 많았다. 당시 9개 면 모두에서 5일장이 열렸고, 소천면 내에서는 석포리, 임기리, 분천리에까지 공설시장이 설치되었다. 인구가 4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현재 봉화군의 5일장은 봉화상설시장(2일, 7일)과 억지춘양시장(4일, 9일) 두 개뿐이다.
영풍제련소가 있는 석포리 인구 감소 폭 작아
석포면의 인구는 2017년 말 기준으로 1079세대 2251명이다. 봉화군 10개 읍면 중 세대수로는 재산면, 상운면에 이어 세 번째로 작고, 인구수로는 재산면, 상운면, 법전면에 이어 네 번째로 작다. 석포면의 인구는 1976년 1만여 명에서 2017년 2200여 명으로 줄어들어 40년 사이에 22% 수준으로 감소했다.
리별 인구를 보면 석포리 인구가 881세대 1830명으로 석포면 인구의 대부분(81.3%)을 차지하고 있다. 세 개리 중 인구가 가장 많이 감소한 곳은 대현리인데, 1976년 4천여 명에서 2017년 300명으로 감소했다. 1976년의 7% 수준으로 크게 감소한 것인데, 연화광산이 폐광하면서 광산노동자가 대거 떠난 것이 주요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구감소가 가장 적은 곳은 석포리이다. 1976년 5400여 명이던 인구가 2017년 1800여 명으로 감소하여 1976년의 34% 수준이 되었다. 석포제련소의 성장으로 고용 인원이 늘어나면서 석포리의 인구감소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포리 내에서도 석포1리와 나머지 2·3·4리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석포 2·3·4리의 인구는 1976년의 14~24% 수준으로 감소했으나 석포1리의 인구는 1976년의 90% 수준이 유지되고 있다. 세대수에서도 석포 2·3·4리는 감소했으나 석포1리는 1976년 248세대에서 2017년 458세대로 오히려 두 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석포1리의 인구감소가 적은 것은 석포리천을 따라 15개 동의 석포제련소 사원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과 연화광산의 폐광으로 석포면 전체 인구는 크게 감소했지만 석포제련소 고용 인원으로 인해 석포1리의 세대수가 두 배로 증가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영풍 자료에 따르면 2017년 8월 기준으로 석포제련소에 고용된 인원은 730명이다(근무인원 380명, 협력사 직원 250명, 현장노동자 100명). 이는 석포리 인구의 40%, 석포면 인구의 32%에 해당한다(태백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얼마나 되는지는 파악이 안 된다. 또한 2019년 영풍 사업보고서에는 임원 26명, 직원 667명, 소속 외 근로자 505명으로 되어 있는데, 서울 본사 등 영풍에 소속된 모든 인원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석포제련소에 고용된 인원 외에도 석포마을에서 식당 등 자영업을 하는 상점들이 제련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주고객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석포제련소가 마을주민의 생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할 것으로 짐작된다.
제련소의 확대로 농업기반 훼손
석포의 인구변화 특징은 농업인구의 구성에도 반영되었다. 봉화군에서 농가세대 비중이 가장 낮은 곳이 석포면이다. 2015년 기준으로 봉화군 전체 세대에서 농가는 35.9%(5896세대)인데 석포면의 농가는 15.3%(163세대)에 불과하다. 논밭이 있던 자리에 석포제련소와 사원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농사를 짓던 주민들이 이사를 가거나 업종 전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석포제련소 가동 이후 농사가 어려워 주민이 떠나면서 그 자리에 제련소 공장이 추가로 들어서기도 했다. 지금의 석포제련소 3공장(굴티공장) 부지는 원래 15가구가 넘게 사는 굴티(굴현)마을이었다. 주민들은 "이 일대에는 벌이나 나비도 없어서 과일 농사도 안 된다"거나 "나무가 다 죽어버리니까 농사야 할 말 있어요?"라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결국 굴티마을 주민 대부분은 땅과 집을 영풍에 팔고 고향을 떠났으며 2005년 그 자리에 석포제련소 3공장 건설 허가가 났다. <악취에 코 막는 사람들 '어떻게 산골짜기에 이런 공장이...'>에서 밝혔듯이 영풍은 불법적인 과정을 통해 3공장 부지에 TSL(아연잔재처리공정) 공장을 건설했다.
석포제련소의 건설과 확대는 석포에서의 농지 축소와 농업인구 감소를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석포제련소 부지와 주변 땅이 중금속에 오염됨으로써 석포의 농업기반과 생태적 지속가능성이 훼손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농사를 짓던 주민들의 삶도 제련소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석포의 농업인구 감소를 제련소 노동자가 보충하면서 인구감소가 적게 나타나는 것이 바람직한가. 환경파괴를 감수하며 제련소에 의존하는 삶이 질적으로 나아진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고랭지 작물 많이 재배되고 산채도 자생
임야가 5분의 4인 봉화의 땅은 돌이 많고 척박하다. 특히 임야가 94%나 되는 석포면은 농사를 짓기에 매우 열악한 조건에 처해 있다. 일반적으로 돌이 많은 땅은 경작이 어렵다. 반면 산으로 둘러싸여 일조량이 부족한 단점을 돌의 보온 효과가 보완하기도 한다.
봉화에서는 씨를 뿌리고 김만 매었다가 결실이 되면 거두어들이는 농업이 오랫동안 답습되었다. 현대에 와서 저수지와 같은 수리시설이 설치되어 전천후 농업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석포면에만 유일하게 수리시설과 수리답이 없다.
석포에는 임야가 많은 만큼 경지가 적다. 2017년 말 기준으로 봉화군 전체에서 논이 3.6%, 밭이 7.3%인 반면 석포면에는 논이 0.04%(6만㎡), 밭이 2.7%(399만㎡)에 불과하다.
'2018 봉화통계연보' 통계를 보면, 적게나마 논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벼가 재배되지는 않는다. 1980년대 중반 석포면에서도 12ha의 논에서 벼가 재배되어 48톤의 쌀이 생산되었으나 그 뒤 서서히 감소하였고 2015년부터는 쌀 생산이 중단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석포에서의 벼 재배는 대부분 석포리천과 석개천 주변의 다락논에서 이루어졌다. 산악지대에 위치해 수리답이 불가능한 석포이지만 그나마 벼 재배가 가능했던 곳은 두 개의 하천 주변에 형성된 석포리의 작은 평야와 낙동강가의 일부 땅이었다. 벼가 많이 재배되던 시절 석포마을은 '참나무 장작불로 이밥 해먹는 동네'라 불렸다고 한다.
해발 500m 내외이거나 그 이상 되는 곳에 있는 석포의 밭에서는 (준)고랭지 작물이 많이 재배된다. 2017년 봉화군 잡곡의 40%가 석포에서 생산되었는데 대부분 옥수수(180톤)였다. 서류와 두류도 봉화군 전체 생산량의 9% 정도 되었는데 서류의 대부분은 감자이며 두류의 주요 작물은 팥이다.
석포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작물은 고랭지 채소인데 배추, 양배추, 무의 생산량이 많다. 2017년 석포면의 배추 생산량은 9500여 톤으로 봉화군 전체 생산량의 45%를 차지했다. 양배추는 270톤으로 봉화군 전체 생산량의 68%, 무는 1천여 톤으로 봉화군 전체 생산량의 29%를 차지했다.
석포에는 약용식물이 재배되고 산나물도 자생한다. 봉화군청 홈페이지에 따르면 석포1리의 나래기마을, 승부리의 결둔과 승부 마을 등에서는 당귀와 같은 약용식물이 재배되며, 반야와 샘터 마을 주변에는 두릅, 더덕 같은 산채(산나물)도 자생한다. 약용식물이나 산나물에 관한 읍면별 통계자료가 없어서 석포면의 생산량을 알 수는 없지만 봉화군 전체 생산현황을 통해 어떤 작물이 재배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유추해 볼 수 있다.
산림청이 발간한 <2018 임산물 생산조사>에 따르면, 2018년 봉화군의 임산물 생산액은 약 155억 원이다. 주요 임산물(작물)을 살펴보면 약용식물은 당귀(38억 원), 천궁(20억 원), 오미자(16억 원), 오갈피(8억 원), 산양삼(6억 원), 하수오(3억 원), 마(2억 원) 등이고, 산나물은 도라지(13억 원), 고사리(3억 원), 취나물(2억 원), 두릅(6천만 원) 등이다. 그 외 장작(14억 원), 생표고(6억 원), 송이(6억 원) 등도 많이 생산되었다.
봉화의 당귀와 천궁 생산량은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데, 당귀는 전국 생산량의 17%, 천궁은 6%를 차지했다. 봉화에서 재배된 당귀와 천궁은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진 송이는 전국 생산량의 2%를 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석포면의 농작물과 임산물 생산 현황을 종합해보면, 고랭지 채소가 많이 재배되고, 약용식물과 산나물은 생산은 되지만 비중이 높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산채가 자생하고 고랭지 채소가 많이 재배된다는 점에서 산채와 고랭지 채소의 고장이라는 석포리의 이미지는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농가소득 저하되고 제련소 의존도 높아가
광산과 제련소가 들어서기 전 석포는 산골 마을이었다. 외지에서 난(難)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거나 내와 강 주변에 논밭을 일구었다. 산은 험하고 땅이 척박해서 삶은 고달팠지만 숙명으로 여기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천기(天氣)를 살피고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이 당연하듯이 문명이 이기(利器)가 없는 불편함이나 고된 농사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가뭄이 들거나 물난리가 나도 땅의 정직함을 믿고 묵묵히 견뎠을 것이며, 자연의 섭리를 잘 알기에 유순했고 가난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기에 순박했을 것이다. 살림이 어려워도 들에서 밥 먹을 때는 '고시네(고수레의 경북 방언)'를 하고 길손에게는 밥 한 상을 대접하며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 광산과 제련소가 가동되면서 석포는 변해갔다. 하지만 주민의 영풍 의존도는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78년에 발간된 <봉화군지>는 소천면 주민들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당시 석포리, 대현리, 승부리는 소천면에 속해 있었다)
"본 면 관내에는 연화광업소, 영풍제련소와 옥방광산, 장군광산, 동화지탄공업주식회사 공장이 유치 건설되어 지방 실업자의 고용증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방이 산간지대에 위치한 관계로 특용작물과 고랭지 채소 재배가 성행하여 수도작 농촌 지역보다 오히려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어 호당 140만 원 소득이 앞당겨 실현되어 가고 있는 실정에 있다."
광산과 제련소가 들어서면서 실업자의 고용증대가 있었지만 농사짓는 주민들은 특용작물과 고랭지 채소 재배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제조업 위주의 산업화 정책과 외국 농산물의 수입에 따른 농가소득 저하가 계속되면서 석포의 농업은 축소되었다. 제련소 시설이 확대되고 고용 인원이 늘어나면서 석포의 제련소 의존도도 높아갔다.
석포의 미래상 과거에서 찾아야
사람은 자연 없이는 살 수 없다.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오염되지 않은 농산물을 먹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 오늘날 전 지구적인 기후위기와 생태계 위기로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앞으로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더욱 자주 발생할 것이라고 한다. 전염병이 심해져 물자의 국가 간 거래가 제한되면 식량자급률이 낮은(2019년 기준으로 45.2%, 가축사료를 포함한 곡물자급률은 21.7%) 우리나라는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농업 인구가 늘어나고 농사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산업화로 농촌이 붕괴되는 속에서 석포마을은 산골 속의 작은 도시로 남았지만 상처를 많이 입었다. 석포의 낙동강은 식수는커녕 농업용수로도 사용되기 어렵고 물고기와 저서생물이 제대로 살 수 없는 상태이다. 제련소 주변에서는 오염물질의 배출로 농사가 지장을 받으며 산림이 고사하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자연은 오랜 세월에 걸쳐 길러온 복원력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견디지만 복원력의 한도를 넘는 상처를 입으면 인간에게 반격을 가한다.
석포의 주인은 산이요 자연이다. 영풍의 광산과 제련소로 인해 훼손되기는 했지만 석포의 자연이 주인의 지위를 잃은 것은 아니다. 석포가 가진 자연환경은 하늘이 준 선물이다. 석포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활용하고 석포의 기후와 토양조건에 적합한 농업을 육성한다면 석포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석포의 미래상은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 50년 전, 100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과거 삶의 양식을 미래 삶의 방향으로 삼을 수는 있다. 석포리 표지석에 새겨져 있는 '산채 및 고랭지 채소 생산의 고장'이라는 문구가 석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영풍 석포제련소로 인해 발생된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고 석포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영남의 낙동강이 시작되는 석포에 사는 주민과 낙동강 수계에 사는 영남의 주민이 함께 나선다면 길이 열릴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 연재 글은 ‘⑦ 일제 강점기 삼릉(미쓰비시) 연화광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