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 되어라” 한인애국단 특공 작전
by 상하이=김지영 기자중국 상하이 황피난루(黃陂南路)는 신톈디(新天地)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화려했다. 골목마다 들어선 유럽풍 카페들의 멋들어진 분위기는 상하이가 ‘동양의 파리’로 불리는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그 골목길 한구석에 붉은색과 회색이 교차하는 벽돌 건물이 나타나자 관광객들이 일제히 휴대전화와 사진기를 들어 건물 중간에 위치한 간판을 찍느라 부산을 떨었다. 간판에는 ‘융칭팡(永慶坊)’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1920년대 임시정부 요인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마당로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에서 10여 분 거리다. 70대에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활동했던 김가진(1846~1922)과 그의 아들 부부가 이곳에서 지냈다. 또 김구(1876~1949)의 가족과 모친도 이곳에서 1922~1926년까지 생활했다. 이 기간은 김구에게 고난의 시기이기도 했다. 아내가 둘째아들을 낳은 뒤 늑막염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고 임시정부가 매진했던 군사활동이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침체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 첫 투쟁―도쿄 일왕 처단 계획
상하이 싱안루(興安路)에 서 있는 홍콩플라자 건물은 100여 년 전 평범한 주택이었다. 옛 주소는 맥새이체라로 24호. 1922년 10월 28일 김구 김인전 등 독립운동가 7명은 이곳에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한다. 그해부터 1932년까지 10년 동안 100만 원의 자금을 확보하고 1만 명의 군인을 양성한다는 계획도 세운다. 초기에는 중국 각처의 군사학교에 학생들을 파견하고 무장독립 투쟁을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노병회는 중도에 해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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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노병회의 정신은 ‘병인의용대’를 통해 명맥을 이어간다. 병인의용대는 의열(義烈) 투쟁을 투쟁 방법으로 채택했는데 노병회에 이어 발족한 한인애국단이 이를 이어받았다. 이후 의열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잠시 주춤했던 임시정부의 상황도 다시 활기를 찾는다.
한인애국단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특공작전을 추진하면서 시작됐다. 독립전쟁을 위해 대규모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는 군대를 준비하는 대신 한인애국단이 채택한 의열 투쟁은 무장 투쟁이었다. 언뜻 ‘테러’를 연상할 수도 있지만 큰 차이가 있다. 김희곤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테러는 불특정 인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다치거나 죽이는 범죄 행위이지만 의열 투쟁은 침략의 원흉이나 통치기관을 처단하고 파괴하는 일이었다”고 설명한다. 일종의 ‘전쟁 중인 적국을 향한 비정규 전투’였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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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은 비밀조직으로, 일제 정보기관은 애국단에 대해 단원 규모는 80명, 핵심인물은 10명 정도로 파악했다. 김구는 1932년 9월 쓴 ‘동경작안(東京炸案)의 진상’에서 자신을 ‘한인애국단장’으로, 이봉창은 “본단에 최선 가입한 단원”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한인애국단이 결성된 뒤 처음으로 펼쳐진 투쟁이기도 했다. 김구는 이어 “(1932년) 1월 8일 사쿠라다몬 앞에서 자기가 던진 작탄이 폭발함을 본 이 의사(이봉창)는 현장에서 가슴에 품었던 국기를 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고 당시 상황을 자세히 소개했다.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이봉창(1901~1932) 의사는 의거가 있기 1년 전인 1931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마당로 건물에 무작정 찾아온다. 당시 김구는 자신이 아꼈던 경호원 한태규가 일제의 밀정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외부인을 믿지 못하던 때였다. 일본어가 유창한 이 의사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의사가 의거를 실행하는 데 1년이 걸리게 된 이유다.
이 의사 의거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은 그가 임시정부 직원들이 술을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를 김구가 듣게 되면서부터다. 동아일보 1946년 1월 10일자에 실린 ‘이봉창 의사 추모기’에 당시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 의사는 열띤 목소리로 “작년에 왜왕이 하야마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을 갔더니 왜왕이 바로 나의 앞을 지나갑니다. 그때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하여 만일 내 몸에 무기만 지니고 있다면 왜왕을 한번에 처치할 일을 해볼 터인데…그만 좋은 기회를 놓치었지요”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를 들은 김구는 며칠 뒤 그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비밀리에 찾아갔고, 일왕 암살 계획이 세워진다.
이 의사가 던진 폭탄은 일왕이 탄 마차를 바로 뒤따르던 두 번째 마차 밑에서 터졌다. 그는 이 마차에 일왕이 탔으리라 짐작했지만 마침 일왕은 선두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내가 흥분한 탓에 생긴 착오였다”며 공격 목표로 삼은 인물이 일왕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한국독립운동사시스템, ‘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한인애국단원의 활동상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원은 윤봉길 의사(1908~1932)다. 옛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있던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 1270룽(弄)은 1931년 상하이로 건너온 윤 의사가 수개월간 살던 곳이다. 이듬해 4월 김구와 윤 의사는 싱안루 169호 건물 2층에 있는 찻집 ‘쓰하이차관(四海茶館·사해다관)’에서 만난다. 현재는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는 이곳에서 두 사람은 훙커우(虹口)공원 거사에 대해 논의한다.
융칭팡과 멀지 않은 위안창리(元昌里) 3호로 향했다. 한인애국단원 김해산의 집이 있던 곳이다. 윤 의사는 훙커우공원 거사일인 4월 29일 이곳에서 김구와 함께 아침밥을 먹는다. 김구는 전날 김해산에게 쇠고기를 사다주며 아침식사 준비를 부탁해뒀다. 윤 의사는 식사를 마치고 폭탄 두 개를 품에 숨긴 채 차를 타고 곧바로 훙커우공원으로 향했다.
현재는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훙커우공원까지는 차로 20여 분 거리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 5분 정도 걷다 보면 윤봉길 의거 기념관이 나온다. 이곳에서 40m 떨어진 지점에 1998년에 세워진 기념비도 있다. 윤 의사의 아호인 ‘매헌(梅軒)’이 적힌 현판 아래 기념관 1층에는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기념관 안 추모 흉상에는 꽃다발이 가득했다.
1932년 3월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의 일본군 무기창고 폭파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폭탄 제작 과정에서 시일이 지연돼 계획이 중단됐다. 그때 시험했던 도시락과 수통 모양의 폭탄을 그는 한 달 뒤 훙커우 의거에서 사용하게 된다. 4월 29일 훙커우공원에선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사변 승전을 축하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일제 군부와 정관계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거사 전날 윤 의사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시를 작성해 김구에게 건넸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라는 내용이었다.
기념관 2층에는 윤 의사의 의거 현장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고 있다. 커다란 폭음과 함께 폭탄이 터지고 단상이 흔들리면서 참석한 일본인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관람객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일본 국가가 끝나갈 무렵 윤 의사가 두 개의 폭탄 중 수통 모양 폭탄의 안전핀을 뽑아 단상으로 던진 뒤 펼쳐진 상황이었다. 폭탄은 정확하게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우에다 겐키치 중장 바로 앞에 떨어지면서 폭발했다. 단상 위에 있던 일제 수뇌 7명이 모두 쓰러졌고 기념식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윤 의사는 자폭용으로 가져간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꺼내다가 검거된다. 이날 의거는 침체됐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전환점이 된 일대 사건이었다.(‘독립운동의 역사’) 기념관에서 만난 30대 한국인 관광객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방문했는데 영상과 자료를 보니 울컥해진다”면서 “교과서나 역사책에서만 보던 윤봉길 의사 의거를 현장에서 확인하니 마음도 숙연해진다”고 말했다.
윤 의사의 훙커우 의거 직후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했다. “조선인이 폭탄을 던졌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날 두 번째 호외를 통해 머리기사 제목으로 ‘조선인으로 판명, 윤봉길, 연령 25세’라면서 윤 의사의 이름과 신상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상하이 현지 신문도 윤 의사의 신원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호외는 현재 상하이 마당로의 임시정부 청사에 전시돼 있다.
▼ ‘조선총독 폭살 계획’ ‘다롄 의거’…한인애국단의 끝없는 투쟁 ▼
한인애국단의 대표적인 거사는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이지만, 이 밖에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1932년에 접어들어 한인애국단의 주도로 준비되거나 실천에 옮겨진 거사는 5개월 동안 6건에 달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펼쳐진 1개월 뒤인 1932년 2월에는 이즈모함 폭파 시도가 추진됐다. 황푸강 훙커우 부두에 정박 중인 일본 군함 이즈모에 일본군사령부가 설치됐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구는 한인애국단에 이즈모함을 폭파할 것을 명령한다. 이즈모함에 잠수로 접근한 뒤 특수폭탄을 설치하고 시간을 정해 폭파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단원 중에서 잠수할 사람이 마땅치 않자 당시 1000원이라는 큰 금액을 주고 중국인 잠수부를 고용했다. 거사일은 2월 12일로 정해졌다. 하지만 거사는 실패하고 만다. 용병으로 채용된 중국인 잠수부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제시간에 폭탄을 설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연대기’)
‘조선총독 폭살 계획’과 ‘다롄 의거’는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와 함께 한인애국단의 4대 의거로 꼽힌다. ‘조선총독 폭살 계획’은 김구의 지시로 이덕주, 유진만이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를 암살할 목적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이들은 1932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형을 받는다. ‘다롄 의거’ 역시 실패로 끝났지만 그 대담성으로 일본에 충격을 줬다.
한 달 뒤인 5월 26일 빅터 불워리턴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조사단이 다롄 역에 도착했을 때 이를 맞은 혼조 시게루 관동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질 계획도 추진됐다. 그러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에서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발각된다. 이로 인해 폭탄을 던지는 임무를 맡았던 유상근 의사와 정보 수집 역할을 맡은 최흥식 의사 등이 체포됐고,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상하이=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