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윤 기자의 트롯맨 열전(1) 한이재

남녀 두 얼굴 두 목소리 열창으로
'아수라 트롯'의 충격 던진 실력자
카페알바로 노래부르다 미스터트롯 도전
새앨범 내고 유튜브채널로 인기 몰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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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2.14 23:22 요즘 ‘트로트팬’ 사이에선 수요일과 목요일 명칭이 ‘수요일년(年)’과 ‘밑요일’로 바뀌었다네요. TV조선 ‘미스터트롯’이 방영되는 목요일까지 목 빼고 기다리다 보니 수요일은 1년같이 느껴지고, 목요일은 미스터 트롯 ‘본방사수’ 날이기에 ‘미(스터)트(롯)요일→밑요일’이 된 거죠. 지지하는 트롯맨에게 ‘투표’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방송이 끝난 뒤엔 그 여운을 잊지 못해 밤새 유튜브를 듣고, TV조선 블로그에 새로운 소식이라도 떴을까 봐 계속 새로 고침을 하며, ‘보도자료는 언제 뿌리나’면서 손꼽아 기다리는 팬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은 것도 얼마 만인가요. “4위 하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엄마 사위!” “노래에 추임새 넣었다가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 막내아들 자리 뺏겼네!” 10대부터 70~80대까지 미스터 트롯을 보기 위해 한 주를 또 견딘다고 합니다. 트롯맨들의 감성을 뒤흔드는 열창을 보고 듣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나오니, 성격까지 개조될 판. 순둥순둥한 ‘멍뭉미’와 도를 넘는 귀여움의 ‘잔망미’, 국가대표급 재주에 아이돌 못지 않은 외모, 모델 같은 슈트핏까지 선사하니 이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겠네요.
패션을 담당하면서 최첨단의 트렌드 현장을 따라잡던 최보윤 기자가 어쩌면 그 대척점에 있을 것 같은 ‘촌므파탈’과 ‘레트로’ 감성 가득한 트로트 판으로 향해 시청률을 흡입하며 전국을 사로잡은 ‘트롯맨’들의 마성을 파고 들까 합니다. 미스터 트롯 참가자들의 이모저모를 다루는 ‘트롯맨 열전’을 시작합니다. /편집자주


한쪽 머리를 장식한 커다란 꽃송이, 어깨를 드러내며 층층이 이어지는 새빨간 러플 드레스와 롱장갑은 마치 ‘위대한 개츠비’ 파티에 초대된 손님 같다. 빨간 립스틱 사이로 “당신이 좋아~”라는 간드러진 목소리가 튀어나오니 왠지 코끝이 간지럽다. 그녀 옆엔 검은색 턱시도 슈트를 빼입은 남성이 있다. 호소력 있는 중저음의 소유자. 박자를 타고 몸을 돌릴 때마다 남녀가 모습을 바꾼다. 이동 반경 30㎝를 넘기지 않는다는 게 스탠딩형 트로트 가수의 정석이라지만, 남녀 좌우는 물론 목소리까지 휙휙 바꾸는 모습에 360도 카메라 위에 올라 무대 위를 몇 바퀴 돈 느낌이다.
‘트로트계의 원플러스원’ 한이재(26)는 단 한번의 등장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1월부터 시작된 TV조선 ‘미스터 트롯’에서 ‘당신이 좋아’(남진·장윤정)를 부르면서 ‘남자반 여자반’ 아수라 백작패션과 남자와 여자 키를 혼자 소화해 ‘아수라 트롯’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오른쪽은 세련된 남자 정장, 왼쪽은 정열의 빨간 드레스로 극적인 대비를 이룬 것도 탁월했다. ‘아수라 트롯이 일으킨 충격의 아수라장’이라는 팬들 표현대로 ‘성(性)’을 넘나들며 장르적 성역 파괴를 한 것이다. 들어도 들어도 놀라운 목소리에 팬들은 그의 유튜브, 팬카페로 달려갔다.
한이재의 도전은 경이로운 묘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내세워 틈새 시장을 공략하는 비기를 보여준다. 비슷비슷하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자신을 알리려는 이들에게 ‘아수라 트롯’ 한이재는 훌륭한 ‘교본’. 이미 선점한 시장이기에 누군가 흉내내면 결국 ‘한이재 짝퉁’이 될 수밖에 없다. 출연 당시 옷이 꽉 끼기도 하고 불편해서 48시간 동안 겨우 한두 끼만 먹었다고 하니, 완벽한 변신을 위한 그의 숨은 고통도 적지 않아 보인다.
한이재는 희망이다. 좌절하고 자책하며 숨어버리는 대신 적극적으로 보여줄 거리를 만든다. 본선에서 탈락하자 그는 유튜브로 자신을 계속해서 보여줬다. 나 역시 바로 ‘한이재 유튜브’ 채널로 향했다. 충청도 출신 한이재는 이제 앨범을 발표한 ‘갓 신인’인데 유튜브 구독자는 이미 4만 5000여명에 달한다. “세상에나!”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 건 한이재와 한이숙의 ‘1대1 데스 매치’ 영상. 미스터 트롯에서 그가 도전하지 못했던 ‘1대1 데스매치’ 과제가 나오자 그 또한 유튜브에 자신이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둘 중 누가 나은지 투표해달라고 덧붙였다. 실력도 알리고, 팬서비스도 선보이니 박수를 보낼 수밖에. 한이숙이 과거 미스트롯에 출연했던 홍자가 도전한 ‘사랑 참’을 선택하자 한 팬은 “이숙씨가 더 잘 불러요. 한이재 올하트! 한이숙 올하트!”라며 응원하기도 했다.
남들이 재밌어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기화’하는 것도 배울 점. 한이재의 아수라 트롯은 할로윈 분장을 했다가 ‘우연히’ 탄생했다. 당시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며 아르바이트했던 한이재는 친구가 해주는 화장이 썩 잘 어울린데다, 손님들 반응이 뜨거운 걸 보고 ‘이거다’ 싶었다고 한다. 여자 목소리를 거의 완벽히 낼 수 있다는 소프트웨어는 이미 장착했으니 하드웨어까지 완벽하게 탈바꿈한 것이다. 우리의 오감은 1초에 1000만개 가까운 신호를 감지하는데, 우리의 뇌는 40개 정도의 정보만 받아들이고 대부분 걸러낸다고 한다. 한이재는 0.01%에 도전했고, 결국 대중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카페 아르바이트생이라며 ‘직장부’에 출연한 한이재의 실력을 가장 처음 알아본 건 미스트롯에 출연했던 가수 공소원. 한이재는 유튜브 채널 ‘공소원tv 감성트로트’에서 “2018년 9월쯤부터 공소원 선배님이 운영하는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하다 현재 소속사 대표님을 소개받게 됐고, 좋은 선배님들의 신곡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처음엔 ‘손님’으로 왔다가 “노래를 엄청 잘한다”는 주변 응원에 라이브 카페 오디션을 봤다고 한다. 공소원은 유튜브에서 “오디션에서 들은 한이재 목소리는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여자가 불러도 소화하기 어려운 ‘고음잔치’인 서문탁의 ‘사랑 결코 시들지 않는’을 원키로 불렀다. “기억해줘~~ 널 사랑한~~~”으로 시작하는 파워풀한 보컬이 필요한 노래다. 폭넓은 음역대 덕분에 여성 목소리를 여자보다 곱고 맑은 톤으로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이재는 이전까지는 ‘집돌이’였는데 노래를 하게 되면서 살도 빠지고 활발해졌다고 한다. 트로트가 그를 바꿔놓았고, 미스터 출연이 그를 또 한번 변화시킨 것이다. 미스터 트롯 출연 이후 라이브 카페에 어머님 손님이 크게 늘었고, 월급도 두 배 늘었다. 각종 행사 섭외 요청도 이어지고 있다.
한이재는 미스터 트롯 출연진들과도 ‘따뜻한 우정’을 잇고 있다. 야들야들한 비음 섞인 꺾기가 구수하게 들리는 신곡 ‘고향가는 날’을 작사작곡한 이가 가수 영탁(본명 박영탁). 영탁은 작곡가 구희상과 자신의 히트곡인 ‘니가 왜 거기서 나와’를 만들기도 했다. 영탁은 앨범에 “연습 녹음으로 들었던 한이재군의 첫 보이스 느낌은 나이답지 않은 굵직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상당히 만족했고 정통트로트에 잘 뿌리 내릴 기대되는 가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이재가 꼽은 미스터 트롯 우승 후보는 임영웅. 임영웅과의 ‘국밥 인증샷’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한이재는 임영웅 유튜브 채널에 오른 미스터 트롯 경연곡 ‘일편단심 민들레야’에 “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울어본 적은 처음입니다. 역시 대단하세요”란 댓글을 달기도 했다.
한이재의 신곡 ‘고향가는 날’은 “이리 봐도 좋고 저리 봐도 좋고 내 맘이 좋구나 사방이 다 좋다”라고 말한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한 사람이 부르는 게 과연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굵직하거나, 간드러진 소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던 한이재. 이재든, 이숙이든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놀라움을 현장에서 소름끼치게 느끼게 될 것 같다.
/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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