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모두 숨쉬기 힘든 때, 이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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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의 엄습, 일상이 된 마스크
이 땅엔 호흡기 장애를 지닌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습기살균제가 몰고온 사회적 재난
피해자 마음 돌봄은 정부의 몫이다

상담실 밖으로 싸우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상담을 신청한 ㄱ씨는 청력과 시력을 거의 잃고, 몸까지 불편해 휠체어에 의지하는 복합 장애인이었다. 상담 진행을 위해선 상담사의 목소리도 따라 커질 수밖에 없었다. 50대 중년 남성인 ㄱ씨는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입어 아내를 잃은 유가족이었다. ㄱ씨도 가습기살균제 피해 여부 확인 신청 후 판정을 기다리던 중, 환경부 산하기관이 발주한 사업을 통해 상담서비스가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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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상담 첫날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라며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장례식 때 찍은 관 사진이었다. 그는 이제 세상을 살 의미가 없다고 소리를 질렀다. 거동이 불편한 그는 매일 한 번씩 아내가 숨진 병원 앞 사거리 찻길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다가 오는 위험한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아마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의 심리적 상태가 위급하다고 짐작하리라. 만약 의료인이라면 그를 자살위험군으로 간주하고 약물치료를 권할지도 모른다. 상담사는 ㄱ씨의 위험천만한 행동이 그만의 애도 방식임을 직감했다.

ㄱ씨는 정부로부터 온갖 지원을 다 받아보았지만, 심리상담 지원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렇다. 환경부가 이런 사업을 발주하기 전까지 심리상담사가 국가 재난위기 지원사업에 참여할 기회는 극히 적었다. 상담사는 상담 분야 박사과정을 수료한 전문가로 그가 아내와 못다한 가슴의 이야기를 충분히 꺼낼 수 있도록 도왔다. ㄱ씨에게는 약물치료보다 억울하게 자신 곁을 떠나간 아내를 편안하게 떠나보내는 ‘애도 상담’이 더욱 절실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심리상담 사업의 연구책임자였던 나는 상담횟수 제한을 최대한 늘렸다. 발주단체는 의학적인 건강모니터링의 관점으로 3회기를 제안했지만, ㄱ씨 같은 대상자는 시작하다 마는 꼴이 되고 만다. 하지만 주어진 예산으로는 최대 10회밖엔 할 수 없었다.

더욱 황당한 상황은 사업이 종료되면 ㄱ씨 같은 대상자에게 더 이상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고 통보해야 할 때다. 대상자 입장에서 다음 공모사업이 발주되기까지 최소한 1~2개월 기다리라고 하고, 혹시 다른 단체가 선정되면 상담사가 바뀔 수도 있다고 하면 얼마나 뒤통수 맞는 일일지 상상해보라. 다행히 환경부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 심리상담 사업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여 수의계약을 진행했다. ㄱ씨는 사업 도중 자신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의학적인 통보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ㄱ씨는 사업종료와 상관없이 상담사의 자발적 헌신으로 현재 60회기 넘게 상담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돌보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최근 국가가 재난 피해자들의 마음을 심리적으로 지원하는 일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사회적 재난을 겪은 생존자는 자신의 마음속 트라우마를 돌볼 여력이 없다. 그래서 국가가 특별한 관심과 예산을 가지고 돌봐주어야 한다. 아직도 세월호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나 광장으로 가는 일이 우선이지, 자신의 상한 마음은 뒷전이기 쉽다. 이에 안산에 세워진 ‘온마음센터’는 이름처럼 국가가 이들의 ‘마음을 온전하게 돌보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2020년 경기도 온마음센터의 사업예산은 연간 40억원에 이르고, 운영인원도 41명이다. 정신과의사가 센터장이고, 보건복지부 정신건강 전문인력인 간호사,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국가 자격제도가 없어 민간자격밖에 소지할 수 없는 심리상담사들은 단 한명도 채용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의 피해현황은 희생자 304명, 생존자 172명이다. 전국에 분포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약 6000명에 이른다. 희생자만도 1500명으로 추정된다. 피해 규모는 12배에 이르지만, 이들의 ‘마음을 온전히 돌보기 위해’ 투입된 예산은 턱없이 적다. 모두가 바이러스 공포로 마스크 속 벅찬 숨을 몰아쉴 때, 사회적 재난으로 평생 호흡기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갈 이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