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남성중심 역사 뒤편으로 밀려난 ‘실’의 위대함
by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총보다 강한 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지음·안진이 옮김
윌북 | 440쪽 | 1만7800원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여신들은 갓 태어난 아기를 어김없이 찾아온다. 세 자매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클로토가 실을 잣으면 라케시스는 그 실을 감는다. 마지막으로 아트로포스가 실을 잘라내 아기가 언제까지 살지 결정한다. 이 운명은 설령 제우스라 해도 바꿀 수 없다. 이렇듯이 실은 ‘운명의 메타포’로 신화에 등장한다.
실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책 저자는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라”고 머릿말에서 운을 뗀다. 당연하게도 옷으로 감싸여 있다. 푹신한 패브릭 소파에 파묻혀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이불 속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이 우리는 천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갓 태어났을 때는 희고 깨끗한 천으로 감싸이며, 잠을 잘 때도 겹겹의 천을 덮는다. 죽음을 맞이하면 수의로 온몸을 감싼다. 이 책은 이렇듯이 인간 삶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온 실과 천에 대해 서술한다. ‘실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였나’라는 부제를 지녔다. 저자는 “직물이 어떻게 세계와 역사를 바꾸었는지를 알려주는 13가지 이야기”라고 밝힌다.
인간은 언제부터 실을 만들었을까. 책에 따르면 2009년 조지아의 식물학자 엘리소 크바바제가 카프카스산맥의 줏주아나(Dzudzuana) 동굴에서 “고대인이 만들어 사용했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섬유”를 발견했다. 물론 현재까지의 상황이다. 이후 추가 발견이 이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축축한 발을 그 동굴에 들여놓았던 시점은 3만4500년 전이며, 그들은 거기서 2000년간 살았다”고 설명한다. 그 혈거인들이 “인류 최초의 직조공”이라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그들은 “식물 내부에서 얻는 섬유인 인피(Bast)”에서 실을 뽑아냈으며, 실의 일부는 S자로 꼬여 있는 데다 대부분 염색된 상태였다. 저자는 “그 기술 수준이 놀랍다”고 평한다.
“오라버니가 나에게 아마로 짠 옷감을 선물하면 염색은 누가 해주지?” 기원전 1750년 무렵, 수메르인들이 불렀던 사랑 노래의 한 대목이다. 비슷한 시기 이집트에서는 “아마가 경제활동의 중심”이었다. 화폐처럼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와 교환할 수 있었다. 바빌로스의 왕은 향나무를 이집트의 리넨과 교환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이집트산 리넨을 사고팔면서 부를 축적했다. 리넨은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는 청결을 상징”하는, 순수하고 고귀한 것이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사제들이 신을 모시는 의식을 진행할 때 항상 새로 세탁한 리넨옷을 입었다”고 썼다. 이집트인들은 초기 왕조 시대부터 “왕족의 시신을 리넨으로 꼼꼼하게 포장한 후 매장”했다.
실과 직물에 대한 저자의 입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11세기 아이슬란드의 음유시인 시그바르트는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면 피오르드에 부는 폭풍이 바람에 날리는 돛을 긁어댄다”고 썼다. 저자는 “바이킹선을 강력한 배로 만들어준 것은 돛이었다”라고 말한다. 천으로 만든, 또 나중에는 양털로 만든 돛이 있었기에 해협을 건너 대륙 곳곳을 유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세 끝 무렵에 가장 각광받았던 양모는 “잉글랜드 왕국을 대표하는 상품”이었다. “12~13세기 잉글랜드의 산비탈은 양떼가 많아 얼룩덜룩”했으며, 그것은 “중세 잉글랜드가 유럽 대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의 배경에도 직물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직물 생산과 판매로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 은행을 설립”했으며, 그 가문의 후원으로 “미켈란젤로는 다비드 조각상을 제작했고, 필리포 브루넬리스키는 산 로렌초 성당을 다시 지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남겼다”는 것이다. 저자는 철이나 석탄이 산업혁명의 동인이었다는 일반적 관점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면서, “사실은 직물이 변화의 중요한 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영국에서 100만명이 넘는 여성과 아이들이 방적공장에서” 일했을 만큼 직물산업의 규모가 대단했다는 것이다.
“13개의 이야기”라고 저자 스스로 밝혔지만 실제로 책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들이 종횡으로 얽혀 등장한다. 남극 대륙과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한 특별한 직물,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우주복, 전신 수영복 등에 관한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그러면서 저자가 일관되게 유지하는 관점은 “실을 잣고 옷감을 짜는 것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세계 곳곳의 신화에서도 이 역할은 ‘여성신의 몫’이었다. 이집트 선왕조 시대의 네이트, 그리스의 아테나, 고대 노르웨이의 프리그, 독일 신화의 홀다, 잉카제국의 마마 오클로,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타이트 등이 그렇다. 일본인들이 믿었던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도 옷감을 짠다.
그러다보니 ‘실과 직물의 역사’가 남성 중심적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났다는 것이 이 책의 관점이다. 당연히 저자는 그것을 다시 복구하겠다는 의지를 책 곳곳에서 내비친다. 실과 직물이 인류 역사를 어떻게 끌고 왔는지를 밝히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로 보인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은 ‘총보다 강한 실’이라는 제목을 붙여 그 측면을 한껏 부각했다. 원제는 ‘The Golden Thread’, 한국어로 옮기면 ‘황금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