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당신이 생각하는 몬스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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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10인이 ‘몬스터’를 주제로 한 단편집을 펴냈다. 소설가 윤이형(왼쪽 사진)은 두려움과 옳음에 대한 이야기를, 손원평(가운데)은 모성과 정상가족 신화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손아람(오른쪽)은 정치 선거판을 둘러싼 욕망과 폭력을 그려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해망상이라는 게 있어.”

소설가 윤이형의 단편소설 ‘드릴, 폭포, 열병’의 첫 문장은 난데없이 ‘가해망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피해망상도 아닌 가해망상은 뭘까. 화자는 설명한다. “사실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도 자기가 뭔가 잘못한 게 아닐까, 누구에게 해를 끼친 게 아닐까 쉴 새 없이 생각하게 되는 증상이지.”

‘드릴, 폭포, 열병’은 지난달 이상문학상의 ‘저작권 3년 양도’ 조항 불공정성에 대해 문제제기하며 ‘절필’을 선언한 윤이형의 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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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 한낮의 그림자
손원평·윤이형·최진영·백수린·임솔아 지음
한겨레출판|200쪽|1만3000원

소설은 이상문학상 사태가 벌어지기 전인 지난해 하반기 모바일 독서앱 ‘밀리의 서재’를 통해 선공개됐다. 윤이형은 문단과 출판계의 부당한 구조를 지적하며 ‘절필’을 선언했지만, 사전에 출간이 예정됐던 단편집들은 출간한다고 밝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손원평·백수린·임솔아·손아람·듀나 등과 함께 ‘몬스터’를 주제로 연재한 소설집 <몬스터>다.

소설은 ‘옳음’을 압도하는 인간의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해망상’은 사회나 조직의 부당한 구조 때문에 야기된 문제에 ‘연루’되길 회피하고, 책임지길 싫어하는 태도를 지칭하는 듯하다. 병든 구조로 인해 피해를 입는 ‘약자’가 있더라도,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싶어 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나도 잘못된 구조에 일조한 게 아닐까’란 윤리적 성찰을 가로막는 것이 ‘가해망상’이란 말이다.

소설은 혜서라는 인물의 억울한 죽음을 중심으로 한다. 혜서는 ‘횡령’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혜서를 비판하는 글을 썼던 윤경은 이에 대한 반성과 참회의 글을 쓰려 하고 소설의 화자는 윤경을 만류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 화자는 물이 새는 낡은 빌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이 새는 곳을 찾기 위해 화자가 살던 4층 마룻바닥을 드릴로 온통 파헤쳤지만 원인을 찾지 못한다. 드릴이 닿지 않는 건물 배관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화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 전체가 이 낡은 빌라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화자는 이어 남미 이과수폭포로 떠났던 출장에서 모기에게 물린 후 기생충에 감염됐다는 망상에 시달린 일 등을 예로 들며 두려움이 갖는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두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그래서 우리를 취약하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며 세상이 “돌아가는 믹서 속 같지. 정신을 차려보면 밑에서는 칼날이 막 돌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온라인을 통해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힘든 정보들이 유통되고, 잘못된 ‘여론 재판’이 내려지는 상황에서 두려움은 곧잘 “옳음을 오염”시키고 판단을 정지시킨다. ‘옳음’을 위한 판단과 행동은 “거친 바다 위에 떠 있는 까만 비닐봉지”와 같을 뿐이라며 ‘침묵’할 것을 강요한다.

‘가해망상’은 곧 두려움 때문에 판단과 행동을 유보하는 눈 감기요 책임 회피에 가깝다. 윤이형은 현대사회에서 ‘옳음’이 확정되기 어렵고 가변적임을 이야기하면서도, ‘옳음’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멈추어선 안된다는 메시지를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윤이형은 ‘눈감지 않는’ 작가였다. 2016년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운동 당시 피해자들과 연대했으며, 문단 내 성차별적 구조와 불공정한 관행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윤이형은 두려움으로 침묵하는 대신 지금 현재 ‘옳음’을 따르기로 했다.

소설 말미에 덧붙인 ‘당신이 생각하는 몬스터는 어떤 모습인가요’라는 질문에 윤이형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올바름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시스템이 지닌 한계나 오류 때문에 약자가 다치는 일이 생겨도 아무도 그들을 구제하지 않는 것. (…) 그대로 놔두면 다음번에는 우리 자신이 그 한계와 오류 때문에 상처를 입을 테니 약간의 수고와 노력을 들여 이 문제를 개선하자고 말하는 일을 곧바로 올바름에 대한 공격이자 위해로 결론지어 버리는 것.”

이어 덧붙인다.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걸까. 조금만 더 자세히 천천히 서로를 살피면서 가면 안될까.”

이 밖에 <아몬드>를 쓴 손원평은 ‘괴물들’에서 ‘단란하고 완결된 가족’을 이루기 위해 시험관 시술까지 받으며 어렵게 쌍둥이를 임신하고 출산하지만, 그로 인해 붕괴되어 가는 한 여성의 삶을 통해 모성과 정상가족 신화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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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 한밤의 목소리
김동식·손아람·이혁진·듀나·곽재식 지음
한겨레출판|200쪽|1만3000원

<한낮의 그림자>에 수록된 작품들이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괴물’의 모습을 그려낸다면, <한밤의 목소리>는 김동식·손아람·듀나·곽재식·이혁진 등을 앞세워 욕망에 휩싸인 인물들을 장르성이 강한 작품을 통해 선보인다.

듀나는 ‘네 몸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에서 외계 행성에 연구를 위해 파견된 인간이 외계인 몸을 숙주 삼아 기생하는 이야기를 연쇄살인사건을 통해 풀어낸다. 손아람은 ‘킹메이커’에서 유능한 정치 컨설턴트를 등장시켜 정치판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그려내며 치열한 세계 속 경쟁과 욕망,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